
백발이 성성한 여든 노인이 검은색 사모에 담홍포를 입고 앉아 있다. 가슴팍까지 내려온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듯하나, 앞을 응시하는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년)의 82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돌아가신 후 100여 년이 지나 조선의 초상화 명수로 이름을 떨쳤던 이명기(李命基·1756~?)가 정조(正祖)의 명을 받아 다시 그린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 정조는 오랫동안 미수 허목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1794년 어느 날, 정조가 영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에게 허목의 초상을 구해보라 명하자, 그는 경기도 연천의 미수의 고택 은거당(恩居堂)에 있던 82세 때의 초상을 받들어 가지고 왔다. 정조는 이명기에게 그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게 하여 궁궐에 두게 하고, 가져온 그림은 원래의 장소가 아닌 조선 유학의 중심지였던 영남의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 서원(소수서원)으로 내려보냈다. 정조와 대신들은 허목의 초상화를 공자와 그 제자들, 주세붕 등의 영정이 모셔진 곳으로 보내게 된 것을 기뻐하며, 천하(중국)의 유학은 쇠퇴하였지만, 유학의 도통이 조선에 있다면서 크게 의미를 두었다. 허목은 은사(隱士)의 삶을 살다 56세 때 처음으로 정릉 참봉에 제수되었고, 후에 우의정까지 지냈다. 66세 되던 1660년 기해예송(己亥禮訟) 때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오면서 강원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나이와 상황을 탓하지 않고, 목민(牧民)에 힘썼는데, 대표적인 업적이 삼척 최초의 사찬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했던 일이다. 그는 학문과 서법을 연구할 때 원류와 근거를 천착했다. 주자 성리학이 성행했던 17세기에 공자와 맹자 시대의 유학인 원시유학과 도교, 불교까지 섭렵하며 독자적인 학문 경지를 개척했으며, 고대 서체인 전서체(篆書體)에 몰두하여 그만의 글씨체를 완성했다. 초상화 속 허목의 모습은 평생 소홀함 없이 학문을 연마하고, 관직 생활을 했던 노학자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