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문화재로 보는 우리 역사]정치·명예욕 모두 버리고 물아일체 삶 택한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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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화음동정

△강원도기념물 제63호 △위치=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면적=1만5,291㎡

조선 현종(顯宗) 때 평강현감(平壤縣監)을 지낸 김수증(金壽增·1624~1701년)은 성리학자로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1652년 관직에 오른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45세의 중년일 때, 아버지(김광찬)가 세상을 뜬다. 3년 상을 치르고 은둔지를 보던 중 소문으로 들었던 화천 땅을 찾는다. 1670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기거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를 지었다.

1675년 성천부사로 있을 때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농수정사로 돌아가 곡운구곡을 조성하고 7년을 살았다. 이때의 은거지와 주변을 그린 그림이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곡운구곡도첩'이다. 1689년 동생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간 곳이 곡운보다 더 깊숙한 화천의 화음동(華蔭洞)이었다. 뒤에 다시 조정에 기용돼 한성부좌윤·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지만 취임하지 않고 은둔했다.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는 김수증이 화악산 북쪽 절경을 이룬 계곡을 이용해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놓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삼일정, 부지암, 송풍정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바위에 새긴 태극도, 인문석, 하도 낙서, 복희, 팔괘 등이 남아 있다.

김수증은 곡운체라 불리는 특유의 예서체를 창안했으며, 이는 추후 김정희의 추사체 등 명서예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그의 조카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은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현실과 현재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강조해 조선 후기 문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들 문하에서 조영석, 정선, 이병연, 김윤겸 등이 배출돼 진경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던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그는 화음동에서 13년 동안 은거를 이어갔다. 1701년 78세의 김수증은 서울에 잠시 들렀다가 잠자듯 숨을 거뒀다.

화음동정사지는 당시 선비들이 시끄러운 정치적 상황을 피해 어떻게 세상과 거리를 뒀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귀중한 역사적 장소다. 1990년 5월31일 강원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최영재기자 yj5000@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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