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이 예산 책정하고 세금 거둬…잘사는 지역 만들기 경쟁
'국가경쟁력 세계 1위, 1인당 국민소득 8만달러, 빈곤율 영국·독일·미국 절반인 7.6%'
이처럼 화려해 보이는 온갖 수식어를 모두 차지한 스위스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는 나라였다. 불과 150년 만에 세계 최고 번영을 이룬 스위스의 경쟁력은 지방분권을 보장한 헌법에 있다.
스위스는 1848년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되도록 중앙정부를 두되 각 주의 자치제도를 살려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할 권리를 가진 헌법을 제정했다. 이는 스위스 지역의 강한 지방분권 전통, 보수적인 구교지역과 진보적인 신교지역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언어와 종족, 종교집단이 모두 달랐던 스위스에게 분권을 강조한 헌법은 갈등 봉합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언어·종족·종교 갈등 '분권' 통해 해결
2,324개 기초단체에 행정·입법·조세권
3천만원 이상 재정사업 주민투표 결정
베른시 주민들 반대하자 올림픽도 포기
스위스 연방헌법 제3조, 제31조, 제47조, 제51조 등을 통해 칸톤(우리나라 도·광역시에 해당하는 스위스 행정단위)은 독자적인 법인격과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다. 26개로 나뉜 칸톤과 2,324개의 코뮌(칸톤보다 한 단계 아래의 행정단위)은 행정, 입법은 물론 조세권까지 갖는다.
이렇다 보니 스위스의 26개 칸톤은 서로서로 '낮은 세금·높은 공공서비스'를 주장하며 유럽 내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한다. 또 마을의 갈등을 해결하고 세금을 얼마나 거둘지 결정하고, 법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주민 총회를 통한 주민들의 찬반 투표로 이뤄진다. 주민들은 세금을 낭비하는 정책 통과를 저지하고 매해 세금을 낮춰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을 검토한다. 스위스 경제학자 르네 프라이 교수는 “스위스는 2,300여 개의 지방정부가 서로 더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니 잘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민 동의 없으면 올림픽도 포기=한국은 1국가 1조세 주의다. 국가에서 세금을 걷어 지방에 내리꽂는 식이다. 그러나 헌법에 칸톤의 자치재정권(수입 자치·지출 자치·예산 자치)이 명시된 스위스는 코뮌과 칸톤이 스스로 세금을 거둬 자신의 살림을 운용한다.
1년에 3~4회가량 열리는 주민 총회에서는 3만 스위스프랑(한화 3,270만원) 이상의 사업에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재정 주민투표가 이뤄진다. 재정 상황에 따라 자신이 내는 세금이 달라지다 보니 주민들은 지자체 살림을 꼼꼼히 점검할 수밖에 없다.
한해에 157억원의 경기장 유지비를 남긴 인천아시안게임, 아직 활용 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평창동계올림픽 경기장 등 한국의 '유치 우선' 정책은 스위스에선 보기 힘들다.
2002년 9월 스위스 베른시는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있었다. 베른시는 대회 유치를 위해 2,200만 스위스프랑(한화 239억8,700만원)이 필요하다는 계획안을 들고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 동의를 얻어야 했다. 2002년 9월22일 주민투표 결과 올림픽 경기장 건설사업과 대회 준비 사업은 77.6%와 78%의 압도적 다수로 거부됐다. 베른시는 이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10만 달러를 납부한 상태였지만 주민들의 뜻에 따라 대회 신청을 철회했다.
■부글부글 갈등 터지기 전에 '세금, 정책'으로 맞춤 해결=스위스 헌법 제3조에 명시된 칸톤 주권에 따라 이뤄지는 고도의 자치는 지역이 당면한 갈등을 가장 빠르고 쉽게 해결할 수 있게끔 해준다.
2013년 '꽃보다 할배'의 배경이 되며 관광객들이 폭증하고 있는 스위스 루체른시. 인구 8만 명의 조용한 동네였던 루체른 시는 최근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폭증하며 마을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대형 관광버스가 하루에도 수십대가 오가며 주차난과 대기오염을 가중시키고 어린이들의 안전까지 위협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것이다.
이에 대해 줄스 구트(Jules Gut·녹색자유당) 루체른시 시의원은 “시민들의 불만이 날로 커져 바르셀로나처럼 관광객 거부 운동이 벌어질 정도였으나 최근 주민총회를 통해 '관광세 도입'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면서 “여행사와 대형 버스에 일정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금으로 관광버스 전용 주차장을 지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구트 의원은 “자체적으로 조세권이 없다면 해결책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우리는 다른 문제들 또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수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사정에 맞지 않은 연방정부 정책도 지역에 맞게 소화 가능하다. 중앙정부가 최근 주택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면 보조금을 주는 정책을 폈지만 루체른시는 100년 이상 된 고택이 지역 주택의 80%가량을 차지해 새로 발전 시설을 설치하기가 힘들었다.
이에 루체른시는 오래된 고택을 방수·방풍·조명 등을 수리해 '에너지를 덜 쓰는 주택'으로 개조할 경우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지역의 사정에 맞는 에너지 정책을 수립했고 중앙정부에 이를 통보했다. 지역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갈등의 해결책을 찾고 새로운 정책까지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한국지방신문협회=강원일보·부산일보
■스위스 헌법 주요 내용
제1편 총강 제3조(주 권한 총론)
주는 연방헌법에서 제한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주권을 향유한다. 주는 연방에 위임되지 아니한 모든 권리를 행사한다.
제3편 연방·주 및 자치단체
제47조(주의 자치권)
① 연방은 주의 자치권을 존중한다.
② 연방은 주에게 충분한 고유사무를 부여하고, 그러한 자치조직권(Organisationsautonomie)을 존중한다. 연방은 주에게 충분한 재원을 부여하고, 주가 고유사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하는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한다.
제4편 연방 보장
제51조(주의 헌법)
① 모든 주는 민주적 헌법을 가진다. 주 헌법은 주민(州民)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주민의 다수가 요구하는 경우에는 개정되어야 한다.
제172조(연방과 주의 관계)
① 연방의회는 연방과 주 간의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보장한다.
② 연방의회는 주헌법을 보장한다.
제129조(조세조화)
① 연방은 연방, 주 및 자치단체 간에 직접세의 조화를 도모하기 위한 원칙을 정하고, 주에 의한 조화의 노력을 감안한다.
번역 출처=한국법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