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제 3차례 동순 중 두번이나 찾아
읊조린 시조 영향 '강성' 명칭 이어져
지린시 오영산·수려한 강 둘러싸여
300년 전 물길따라 황실공품 납품
청산녹수에 둘러싸인 중국 지린성 지린시의 아름다움은 산명수수(山明水秀)로 형용할 수 있다. 이곳은 동북 3성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양경(兩京)의 병풍으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의(二儀·양과 음)가 분명하고 팔괘(八卦) 구상(九象)이 구전하며 풍수적으로 신비로움을 모두 갖춘 곳이다.
지린시의 역사를 열어보면 '선박으로 이름이 있고 선영(船營)으로 도시를 이룬' 역사적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 중국 청나라의 캉시황제(강희제·청나라 4대 황제)가 세 차례 동순(東巡·나라의 동쪽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일)을 진행했는데 그 중 두 번은 지린시에 들릴 정도로 백년의 강성(江城)은 천고일제(千告一帝·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황제라는 뜻으로 강희제를 일컫는 말이다)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함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지린에 남긴 캉시황제의 발자취를 찾아보자.
■오늘까지 남아았는 선영(船營) 그리고 강성(江城)이라는 미명을 얻기까지 -위치:지린시 두도(頭道)부두
지린시 선영구(船營區) 임강문 대교에 서있노라면 송화강물의 습기가 많고 맑고 산뜻한 냄새가 미풍에 실려 코끝을 호강시켜준다. 다리 밑에 위치한 두도(頭道) 부두유적공원까지 걸어가면 대형청동조각군이 강변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중 캉시황제의 청동상이 유난히 눈에 띈다. 캉시황제는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우리 함께 캉시황제 청동조각상의 눈길을 따라 3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송화강의 수면 위에 깃발을 꽂은 선박들과 그 위에 서 있는 칼과 방패로 무장한 수사영(水師營) 병장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청나라의 지린수사(水師·수군)가 대열을 짓고 캉시황제의 검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682년 짜리로씨야(황제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의 침범에 저항하기 위해 캉시황제는 조상을 추모하고 세속을 살펴보는 것을 구실로 처음으로 동순을 시작했는데 첫 목적지가 바로 지린이었다. 벽에 걸린 청동 조각군은 캉시황제가 황태자와 궁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지린 수사영을 시찰하는 성황을 그려낸 것이다. 인물군 조각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캉시황제가 창작한 '방선가(放船歌)'가 벽에 조각됐다.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캉시황제가 선두에 우뚝 서서 '호호탕탕 흐르는 물결에 교룡이 놀라고 수많은 선박이 강성에 머문다'라는 시조를 읊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듯 그려볼 수 있다. 지린시의 '강성'이라는 이름은 그때로부터 얻게 되였으며 오늘까지 줄곧 사용돼 왔다.
■오동북에는 보물이 많고 우라에는 신기함이 가득하다 -위치:지린시 우라제진
고금을 넘나들며 우리의 초점을 지린시 우라제진으로 집중시켜보자. 청나라 순치황제 통치기간 이곳에 다성우리총관 관저를 설립했는데 주요하게 황실 납품기지로 동북의 중요한 물산을 집결시켜 끊임없이 경성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했다. 고서에 따르면 전성시기 때 황실공품 종류가 3,000여가지에 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주, 순황어, 잣, 꿀 등 황실공품을 가득 실은 마차가 한 대 한 대 이곳에서 출발하여 천 리 밖의 자금성으로 납품하러 길을 다그친다. 그 중에서 기세가 가장 호호탕탕한 장면은 동지섣달에 황어를 경성으로 수송하는 장면으로 꼽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지린성(吉林省)의 유명한 민속학자 시립학은 우리에게 아래에 같은 장면을 설명해 줬다.
■오영산과 수려한 강에 둘러싸인 지린시의 역사이야기 -위치:지린시 북산공원
북산공원에 들어서면 먼저 9.9m 높이의 금색용문조각이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용 모양의 거대한 돌 위에 북산의 옛이름 구룡산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698년 2차 지린동순 때 캉시황제는 지린장군부에 머물면서 북쪽을 멀리 바라봤다고 한다. 이때 줄줄이 이어진 아홉 봉우리가 눈에 띄었는데 마치 구룡이 놀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구룡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수행한 술사(術士)가 캉시황제에게 이르기를 이 산은 왕기(王氣)가 왕성해 누르지 않으면 이후 천자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캉시황제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 사람들에게 명하여 몇 개의 봉우리를 깎아 없애고 절을 세우게 해 용기(龍氣·용의 기운)를 누르도록 했다. 이렇게 구봉이 없어지고 구룡산이라는 이름도 점차 북산으로 바뀌었다.
큰 길을 따라 산 중턱에 이르면 단공(單孔)을 가진 궁형다리가 동서 양쪽에 위치한 산의 단렬부위를 이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캉시황제가 북산에서 수렵할 때 이곳에서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지린장군에게 두 산봉우리가 이어진 곳을 끊어 북산의 왕기(王氣)를 제거하도록 했다고 한다.
산정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지린시 사면이 청산에 둘러싸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려한 풍경이 캉시황제의 눈앞에도 똑같이 펼쳐졌고 캉시황제가 직접 '4대 영산'이라고 명명했는데 바로 전(前) 주작(주작산), 후 현무(북산), 좌 청용(용담산), 우 백호(소백산)이다. 오늘날, 4대 영산은 여전이 우뚝 서 있고 캉시황제와 지린의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를 후세들에게 속삭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강원일보와 기사 제휴를 한 중국 지린성 최대 언론인 길림일보의 기사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대부분의 중국식 표현을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취재=서무기·번역=장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