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민들 삶의 현장 언덕길 논골마을
청년들 공공미술프로젝트 벽화 그려
관광객 몰리며 카페 등 지역경제 회생
1940년대 동해 묵호항이 개항하며 생긴 논골마을은 가파른 언덕길로 오징어 손수레가 흘린 바닷물이 늘 질퍽여 '논골'로 불렸다. 정주자에게는 '슬레이트 지붕이 빼곡한 달동네'였지만, 여행자에게는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었다. 외지 청년들은 그 삶에 대한 공감과 존경을 담아 담에 그림을 그렸고, 논골은 새로운 가치를 얻으며 2010년대 '논골담길'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청년 창업을 통한 인구 유입, 더 나아가 도시재생 전문인력 양성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사례다.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온 할머니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원더할매'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현우 대표.
■담벼락 그림에 위로를 얻은 사람들=지난달 31일 오후, 관광 차가 쉴 새 없이 오간 묵호등대 논골담길 주차장. 창작 스튜디오 '프로젝트 미터'의 유현우(34) 대표를 만나는 길, 매점에서 “어이, 유 화가! 그림 그리러 언제 또 올꺼노?”란 목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산증인, 손만택(80)씨였다.
부인 조분남(75)씨는 “젊은 사람들이 추운 날,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림 그리느라 고생한 게 생생하다”며 “그림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차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의 50대 주인, 김정순씨는 “몸이 아파 좌절했던 2012년, 묵호등대에 왔다가 일출과 담에 그려진 그림에 위로를 얻었고 서울에서 아예 내려왔다”고 말했다. 담화를 보러 논골3길로 갔다. 골목의 추억을 되살린 논골상회,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온 할머니들에 대한 오마주(존경)인 원더할매, 달동네 꼭대기로 향하는 발걸음을 위한 응원인 묵호벅스 등의 그림이 있었다.

◇옛 골목 논골상회를 그대로 재현한 그림.
■어촌 삶을 재해석한 공공미술=이 그림들은 2011년 유현우 대표를 비롯한 서울의 예술대 학생들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그렸다. 당시 동해문화원이 기획한 사업에 초청된 외지 청년들은 살고 있는 사람과 보는 사람, 그린 사람 모두가 공감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개월에 걸쳐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유 대표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 논골을 살리고, 오래된 건물과도 잘 어울리도록 명도, 채도를 낮춰 색감을 맞췄다”고 말했다. 묵호등대 주변 자연경관, 어촌 삶을 재해석한 담화가 알려지며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다. 동남아 등 외신들도 취재해 갈 정도의 관광지가 됐다. 지금은 주말 방문 차량이 1,000여대에 이르면서 골목 사이로 커피점이 25개, 게스트하우스 등이 30개 생겼다. 서울 토박이인 유현우 대표는 논골담길에 매달린 20대 중반부터 1년에 4개월 정도씩 동해에 머물렀다. 일하며 지금의 부인을 만나고, 아이를 낳으며 동해에 정착했다. 심지어 경기도 부모님도 동해로 주거지를 옮겼다.

◇논골3길에 있는 담화.빨랫줄에 오징어를 걸어 말리던 옛 모습을 재현했다.
■청년 인구 유입책 '레지던시 프로그램'=논골담길 프로젝트 경험을 살려 유현우 대표는 공공예술, 컨설팅을 하는 창작 스튜디오 '프로젝트 미터'를 오픈했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강원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태권도장을 리모델링하고, 레지던지(Residency)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을 오픈할 예정이다.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이 특정 공간에 잠시 체류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것으로, 논골담길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유현우 대표는 올 들어 동해 동호지구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의 사업총괄코디네이터도 맡게 됐다. 유현우 대표는 “레지던지 프로그램은 외지 청년 인구를 자연스럽게 지역으로 유입하고, 정착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시재생 코디네이터 인력난을 겪는 강원도에 좋은 실마리를 주는 아이디어였다.
신하림기자 peace@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