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려 온 이들이 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강원도 동계스포츠 발전을 위해 길을 터준 개척자들이다. 개막을 50일 앞둔 지금 이들은 동계스포츠 불모지였던 대한민국, 그것도 고향인 강원도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에 아직도 꿈만 같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그들은 후배들이 안방에서 힘차게 도약하기를 바라고 있다.
고교때 일반부 제치며 스타덤 우리나라 스키국가대표 3호
후배들 좋은 기록 확신 평창서 자원봉사로 성공 개최 앞장
1967년 2월 평창군 대관령면 지르매 제1 슬로프에서 열린 제48회 전국체육대회 동계스키대회. 고등부 선수가 남자 스키 800m 경기에서 일반부 대표보다 8초나 빠른 기록으로 우승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이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선발,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하지만 체격, 기술이 좋은 유럽과 미국 선수들의 벽은 높았다. 그는 남자 회전에서 예선 탈락, 대회전에선 출전 선수 120명 중 80위에 그쳤다. 그러나 대회전 경기에서 넘어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한국 스키 국가대표 3호 어재식(69) 대한스키협회 스키원로인회 부회장의 동계올림픽 경험기다.
■유럽인 모두 일본 사람으로 오해=프랑스 그르노블 현지인들은 그를 보고 일본인으로 오해했다. 한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르거나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태극기를 주면서 '코리아'라고 알렸다.
“그렇게 알려줬더니 '코레~'라고 부르며 응원해주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1968년 그르노블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에서는 각 종목마다 120여명이 출전했다. 회전 종목은 60위 안에 들어야 결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어 부회장은 물론 일본 선수들도 모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반면 대회전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 한국 스키의 상황은 걸음마 단계였던 만큼 열악했어요. 대회전 경기에서 이 악물고 결승선을 통과해 한국 스키를 전 세계에 알렸다는 게 아직도 가슴 한편에 뿌듯함으로 남아있죠.”
■열악했던 한국 스키=어 부회장은 1948년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대관령에서 태어났다. 도암초교(현 대관령초교) 3학년 때 스키에 입문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겨울철 교통수단은 썰매와 스키였다. 스키는 단단한 고로쇠 나무를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들었다. 자연스레 스키를 접했다.
“스키가 참 귀했던 시절이었죠. (스키장에는) 지금 같은 리프트 시설이 전혀 없어 정상까지 하루 종일 걸어 올라갔어요. 열악한 환경에서 스키를 탔기 때문에 스키부츠 조차 없어 일반 신발을 신고 하루 종일 훈련하다가 발이 꽁꽁 얼어 엄청 고생했었죠.”
강릉 명륜중, 춘천농고(현 소양고), 동국대, 육군 공수특전단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뒤 1973년 용평리조트에 입사했다. 그가 입사한 뒤 1974년 국내 최초의 근대식 스키장인 용평리조트의 개장으로 한국 스키는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수 많은 국내외 대회를 유치하며 용평리조트를 전 세계에 알려 나갔다.
■반세기 만에 또다시 동계올림픽을 경험=평창동계올림픽은 어 부회장이 출전했던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동계올림픽 이후 딱 50년 만에 열리는 대회다. 그것도 고향 평창에서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을 위해 스키원로인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로 동참한다. 대회 기간에 그가 활약할 곳은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센터다.
“제 고향에서 열리는 만큼 자원봉사자 역할에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에요. 메달 획득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이 이번 대회에서 아주 좋은 기록을 낼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한국이 동계스포츠 강국으로 거듭난 것은 물론 명실공히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어 부회장 같은 개척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경모기자 kmriver@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