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년(영조 33·단종 사후 300년) 영월읍에서 단종 임금을 추모하면서 자식 얻기를 학수고대하던 선비 고순익(高舜益)이 영월읍 관풍헌 인근 오막살이에서 딸 노옥(玉)을 낳음. 노옥은 단종 임금 노산군이 점지해준 옥(玉)같이 소중한 자식이라는 의미.
■1762년(?) 노옥의 어머니 별세. 3년뒤 아버지 고순익마저 별세.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을 꾸리며 생활.
■노옥이 이웃에 살던 추월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로 입적, 어려운 형편 탓에 기생으로 생활. 뛰어난 미모와 능한 가무솜씨를 가진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기명을 가지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온갖 유혹을 다 받았으나, 몸가짐을 깨끗이 함으로써 그 명성은 날로 높아감.
■열다섯 살 되던 해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사랑에 빠짐. 영월 부사인 아버지가 한양으로 영전하고 이수학은 과거에 급제한 후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굳게 약속을 한 후 귀성.
■이후 영월부사인 구협(具挾)이 병으로 죽자 그 후임으로 당대의 문장가이며 호색가로 소문이 난 신광수(申光秀)가 영월 부사로 부임해 경춘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했으나 경춘은 전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신광수 부사의 청을 거절.
■1773년 신광수는 경춘에게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 경춘은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한 후, 한양에 있는 이수학이 주고 간 사랑의 증표를 지닌 채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투신한 금강정 낙화암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으로 절개를 지킴.
■1773년 12월의 승정원일기에 “영월부사 신광수는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고 기록됨에 따라 경춘이 금강정에서 투신한 두 달 후 신광수는 결국 삭탈관직을 당한 것으로 짐작.
■1795년(정조 19년) 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영월을 순시했을 때 경춘의 슬픈 사연을 듣고서는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고 '고경춘 순절비' 건립을 적극 후원.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글을 짓고 영월 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경춘이 투신한 낙화암에 '월기경춘 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 내용의 비석을 세워 후세에 경춘의 절개를 높이 찬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