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이 굽이돌아 흐르는 절벽 위 강변 금강공원에 화강암의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석은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 라는 비명이 말해주는 대로 영월의 관기 고경춘(高瓊春)이 순절한 곳에 세워진 것으로 목숨을 바쳐 지킨 절개와 마음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첩첩 산첩첩, 영월은 예로부터 자연 풍광이 빼어나고 사람들의 마음 또한 질박하고 순정한 곳이었다. 곳곳의 비경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 그 신비함을 더한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어린 임금 단종에 대한 애틋한 슬픔과 추모의 마음은 숱한 설화와 전설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비단길처럼 깊고 푸른 동강의 절벽, 단종이 죽자 그를 따르던 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단종의 혼령에게 크고 작은 고기들이 줄을 지어 나타나 부디 태백산의 신령이 되어야 한다고 진언했다는 어라연, 마침내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수호신으로 받드는 신앙 등이 그러하다.
고경춘은 조선조 후기 영조 임금 때인 1757년 가을 영월읍 관풍헌 인근에서 벼슬은 없었으나 글읽기를 좋아하는 선비 고순익의 딸로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난 날이 마침 노산군 단종 사후 300년이 되는 기일이었다. 고순익은 노산군 단종이 점지해준 옥같이 귀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노옥(玉)이라 지어 애지중지 길렀다. 결혼한 지 여러 해 만에 본 늦둥이딸을 태백산 산신이 신령한 영험으로 잘 보살펴주리라는 믿음과 바람이었다.
가세는 빈한했으나 사람 사는 도리를 지키고 곧은 기개와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슬하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나는 노옥은 용모가 아리땁고 성품과 행동거지가 조신하였다. 그러나 이 가족의 단란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옥이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겨우 걸음발을 떼는 사내동생과 함께 천애 고아로 남겨진 노옥은 이웃에 살던 추월이라는 나이 든 관기의 수양딸이 되어 동생과 함께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노옥은 추월에게서 춤과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관기의 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관기가 되는 것이 법규였다. 기생이 되어 관아의 연희나 행사, 큰손님을 접대하는 잔치 자리에 나가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일을 하며 수양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열다섯 살이 되자 노옥은 '경춘'이라는 이름으로 관아의 기생이 되었다. 미모와 더불어 가무에 뛰어난 어린 기생 경춘은 어느 자리에서나 단연 꽃처럼 돋보여 뭇 사내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비록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는 있으나 선비의 자식이라는 기개와 자존심이 있어 행동거지가 단정하였다.
버드나무에 파르라니 물이 오르는 어느 이른 봄날, 경춘은 빨랫거리가 든 함지를 이고 동강가로 나갔다. 마침 강 건너 금강정에 놀러 나왔던 영월부사 이만회의 아들 이수학은 봄날 한적한 강가에 울려 퍼지는 청량한 빨랫방망이 소리에 강 건너로 눈길을 주었다. 환한 햇살아래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 탐스러운 머리타래에 물린 담홍색 댕기가 버드나무 연둣빛 그늘과 함께 맑은 물에 어리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때 아니게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눈이 부시고 가슴이 아려왔다. 어쩌자는 작정도 없이 사공에게 일러 배를 강 건너에 대었다.
말을 붙이기는커녕 감히 다가가지는 못하고 서너 발치 떨어진 곳에서 경춘이 빨래하는 모습을, 그 물그림자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찬 강물에 바알갛게 언 손이 해맑은 얼굴과는 달리 애처롭게 거칠었다. 경춘은 물에 비치는 낯선 청년의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숙인 채 방망이질을 할 뿐이었으나 두방망이질치는 것이 빨래방망이인지 쿵쾅대는 제 가슴인지도 몰랐다. 빨래를 마친 경춘이 빨래함지를 머리에 이려 하자 이수학이 그것을 번쩍 들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경춘은 비로소 그가 관아에서 먼발치로 본적이 있는 사또의 자제, 인물준수하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이수학임을 알아보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를 한갓 노류장화로 여기어 허수로이 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나도 그저 내 마음을 어쩔 수 없구료.”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졌다. 사또의 자제와 관기와의 관계로,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그들의 연사는 더욱 뜨겁고 간절했다. 사랑에 취해 꿈결처럼 달이 가고 해가 갔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이어질 것 같았던 날들이었으나 이듬해 가을이 올 무렵, 이별이 찾아왔다. 영조 48년 음력 7월 이수학의 부친 이만회가 한양으로 영전이 된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꼭 데리러 올 것이오.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이오.”
“이 몸도 마음도 오로지 서방님의 것입니다. 어떠한 모진 풍파가 와도 세세생생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경춘은 이수학이 백년가약의 맹세로 준 사랑의 편지를 품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다.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정인의 장원 급제를 빌었다. 밤마다 한양의 서방님을 찾아 천릿길 만릿길, 꿈길을 걸었다.
그해 10월21일 새로 부임한 영월부사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신광수였다. 그는 성품이 모진데다가 호색한이기도 했다. 부임하는 날부터 경춘의 단아하고 청순한 미모에 반한 그는 수시로 침소에 불러들여 수청 들기를 요구했다.
거스를 수 없는 명이었으나 경춘은 이수학에게서 받은 정표를 보이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럴수록 몸이 단 신광수의 요구와 집착은 집요해졌다. '관원은 관기를 간(姦)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으나 허울뿐이었다. 관기는 지방수령이나 막료들의 위안 대상이 되어 수청기(守廳妓) 노릇이 공공연하였다. 그들에게 관기란 말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요 한갓 노리개였다.
경춘이 거절할수록 오기가 치솟은 신광수는 수시로 경춘을 불러들여 수청 들기를 요구하고 불응하면 볼기를 쳤다. 이렇게 시달림을 받다가 종내 매끝에 죽게 되겠구나 생각한 경춘은 어느날 곱게 차려입고 사또 앞에 나아가 말했다.
“제가 지금은 몸이 아프니 며칠간 말미를 주시면 몸을 추스르는 대로 명을 받잡겠습니다”
다음날, 경춘은 동생을 데리고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스산한 가을 햇빛아래 말없이 잠든 부모가 가슴 저리게 그리웠다. 나 없이 어린 동생이 어찌 살아갈까.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동생의 머리를 곱게 빗겨 준 뒤 집으로 돌려보내고 동강 절벽 위 바위로 올라갔다. 이수학과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운 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건만 그 행복했던 날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수학과 함께 보낸 나날들과, 먼 옛날 이곳에서 꽃처럼 떨어지던 궁녀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비쳤다.
탈래탈래 댕기 머리를 흔들며 뛰어가는 동생의 모습이 산모롱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경춘은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임진년 10월 경춘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시신이 발견된 후, 경춘이 저고리 앞섶에 꿰매어 간직하고 있던 이수학의 편지를 본 사람들은 그 사랑과 굳은 절개에 할 말을 잃고 신광수의 악행에 치를 떨었다. 신광수는 결국 이듬해인 1773년 영조 49년 12월에 영월부사직에서 물러났다. 승정원일기와 영월부읍지에 '영월부사 신광수는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렀다. 도순찰사 이손암이 관동지방을 살피던 길에 영월을 지나다가 경춘의 슬픈 사연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미천한 신분이나 진실로 열녀로다. 옳은 풍습을 세웠으니 길이 기려야 마땅할 일이다'하며 자신의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주도록 일렀다. 하여 평창군수 남희로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월기경춘순절지처' 비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1795년 을묘 8월, 경춘이 죽은 지 24년만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