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이효석 탄생 100주년](1)이효석의 생애

1938년 크리스마스 날 저녁 평양 창전리 자택에서의 이효석. 그의 엑조티시즘(exoticism)이 잘 드러난다.

 -'가난'에서 도망치려다 '고독'에 갇히다

 올해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선생의 탄생 100주년이다. 1907년 평창군에서 태어나 주옥같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남긴 '평창의 자랑' 가산 이효석. 그를 기리는 행사가 23일 탄생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가을(10월)까지 장장 9개월간에 걸쳐 펼쳐질 계획이다. 이에따라 이효석 선생의 개인사와 작품세계, 효석문화제 등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싣는다.

 ■ 개인사를 통해 본 가산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이란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절창의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이효석. 그러나 그는 한때 프로레탈리아 문학에 투신했고 향토색보다는 서구 지향적인 심미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작가였다.

 사실 효석은 못말릴 정도로 서구적인 것과 심미주의적인 것에 매료돼 있었다. 1930년대에 모카, 퍼콜레이터(여과장치가 달린 커피주전자) 같은 생경한 서구문물을 즐겼고 나비장식을 한 칠보구두에 최신식 중절모를 고집했던 '모던보이'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화려해보이는 효석의 삶 속에는 '상실'과 '컴플렉스' '가난' '상처'와 같은 단어들도 동석해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심약한 사람이었고 곧잘 상처를 받았다.

 '가난'과 '문단으로부터의 비난' 같은 화인들이 효석에게도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 그의 일생의 반이 문학에에 대한 자폐적인 몰입이었다면 나머지 반은 '고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미주의적 로맨티스트로 '순수'에의 미몽(迷夢)을 꾼 가산 이효석. 그의 생애와 개인사, 그리고 상처들을 에피소드 위주로 살펴본다.

■ 에피소드1-“고향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효석은 1907년 2월23일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출생한다. 진부면장을 지낸 아버지 이시후와 홍천군 기린면 진동리 출신인 어머니 강흥경 사이에서 태어난 1남3녀 중 장남이었다.

 그러나 눈길을 끄는 것은 친어머니라고 알려진 강씨가 계모였다는 설이다. 효석의 부친은 어린 아들을 봉평에서 40㎞나 떨어진 평창읍내의 평창공립보통학교로 보내 6년간 하숙을 하게 했는데, 장녀인 이나미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강씨와의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신동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영민했던 효석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효석의 인간혐오증이나 이기주의적인 탐미의 습성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효석은 어떤 연유에선지 유학생활을 시작한 후로 거의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1936년 11월 잡지 '조광(朝光)'에 실린 '향수'라는 설문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선생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강원도 평창군. 거기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있다면? 고기잡이하고 목욕하던 강 연안. 선생의 나신 집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헐렸는지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효석에게 고향은 잃어버린 노스텔지어이자 상처였을까. 실향의식이 왜 그리고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효석에게 고향은 엷디 엷은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 에피소드2-“너도 개가 다 됐구나”

 이효석에게 가장 큰 상흔을 남긴 시기는 청년기였다.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때부터 문학수업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 효석은 1925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당시 유행하던 프로레타리아 문학, 즉 좌파문학에 몸담게 된다. 프로문학의 대부였던 임 화 같은 인물들도 효석을 대단히 탁월한 작가로 평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주목받던 작가 효석은 대학을 졸업한 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대학을 나온 뒤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했고 일본인 스승에게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한다. 그런데 그 자리가 공교롭게도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던 것.

 당시의 작가들은 모두 창작물을 무자비하게 검열하는 경무국 직원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효석은 변절자로 혹독한 지탄을 받게 된다. 민족과 문학을 배반한다는 비난이었다.

 이갑기라는 카프계열의 청년은 길거리에서 마주친 효석에게 욕설을 퍼붇는다. “너도 개가 다 됐구나”. 심약했던 효석은 그 자리에서 실신해 버리고 만다. 가뜩이나 이 일로 고심하고 있던 그에게 이갑기의 말은 커다란 상처였다.

 그는 곧 직장을 그만두고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가 효석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시련기였다. 밥도 노동자들이 다니는 뒷골목 10전 균일식당에서 사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가난 속에서도 그는 찻집에도 가고 극장도 다니며 예술이야기에 열중했다. 생활은 초라했지만 마음만은 항상 구름위의 문학을 꿈꾸었다.

 ■ 에피소드3-“여자는 넥타이 같은 것”

 '연애적 모험성이 있고 눈자위에 윤택이 흐르고 응시하는 초점이 확실하지 못하여 나를 노리는지 혹은 내 등 뒤 죽은 석고 조상을 바라보는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여인, 루날의 뿌랑슈급의 여인….'

 효석이 그리던 여인상이다. 그는 연애지상주의에 빠져있던 로맨티스트였고 나쁘게 말하면 여성편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데이트를 하는 멋쟁이 아가씨들도 있었다.

 어느날 효석과 절친했던 최정희 여사가 효석의 집을 방문했을 때 효석의 아내인 이경원은 친정에 가고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다가 숨어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된 것. 이에 효석을 비난했더니 그는 '그 여자는 내게 색채 좋은 넥타이 정도일 뿐'이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좋은 색채의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선망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이 여자와 거리를 함께 걸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다는 것이다.

 효석은 친구 한수철에게도 “애정만 있다면 그뿐 아닌가? 그 밖에 우리가 더 생각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효석에게는 '애정'이라는 것이 인생을 사는 가장 큰 의미였던 것이다. 그의 결핍과 애정지상주의가 어느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단면인 셈이다.

 그러나 효석은 바람둥이였지만 아내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940년 아내와 사별한 효석은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장덕조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낸다.

 “언제나 사람이 죄악에서 구원될까-가 아니라 고독에서 구원될까-하는 것이 제게는 하나의 종교적인 초려가 됩니다. 참으로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요.”

아내와 사별한 후 효석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그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그는 자전적인 소설 '일요일'에서 자신도 세상을 버렸으면 하고 생각해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쓰고있다. 또 사랑이 없는 생활은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고도 썼다.

 ■ 도피를 꿈꾸는 '햄릿'

 효석은 아내와 사별한 후 2년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만다.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나라를 잃은 이 땅에 태어나 더러 시류에 순응했으나 대체로는 자기만의 고독한 세계에서 유폐된 채 살았던 작가 이효석. 그는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도피를 꿈꾸는 햄릿같은 사람이었다. 생의 절반을 문학에, 나머지 반을 고독에 헌신한 '스스로를 유배해 버린' 작가였다. 민왕기기자·wanki@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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