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천에는 자연이 빚어낸 비경이 있다. 바로 ‘곡운구곡(谷雲九曲)’이 주인공이다. 지금의 화천군 용담리 일대에 자리 잡은 이곳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김수증(1624~1701년)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장소다.
김수증은 이곳을 중국의 주희가 머문 무이산의 ‘운곡(雲谷)’에서 착안해 ‘곡운(谷雲)’이라 이름 붙였고, 절경이 뛰어난 아홉 곳을 선정해 ‘곡운구곡’이라 이름 지었다.
김수증은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인 1670년, 벼슬을 내려놓고 화천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가 머물던 곳은 구곡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제6곡 ‘와룡담(臥龍潭)’이었다. 이곳에는 그가 직접 지은 농수정과 곡운정사가 자리했다. 정사는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는 공간으로, 후에 서원으로 발전하기 전 학당의 역할을 하였다. 김수증은 자신이 사랑한 곡운구곡의 풍광을 남기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1682년, 평양에서 활동한 궁중화원 조세걸에게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을 그리게 했다. 실경산수화와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화첩에는 ‘와룡담’을 비롯한 아홉 곳의 절경이 담겼고, 그림마다 당대의 문인들이 쓴 시가 곁들여졌다. 이는 단순한 산수화가 아니라 김수증의 삶과 철학이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와룡담’ 그림을 보면 중간에 작은 띠풀집과 그 앞을 오가는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곡운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김수증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농수정’에는 여러 건물과 소를 모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김수증이 가족과 함께 정착해 생활한 흔적을 보여준다. 김수증이 화첩을 제작한 이유는 조카 김창협(金昌協)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때때로 산을 떠나 이 구곡을 늘 안중에 담아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선 시대 많은 선비들은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이상적인 삶을 꿈꿨고, 실경산수를 통해 그 애정을 표현했다.
이후 김수증의 두 동생이 당쟁의 희생양이 되면서 그는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화음동정사’를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은거지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상향이었고, 오늘날 화천을 대표하는 역사적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곡운구곡도첩’은 조선 시대 구곡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김수증이 머문 공간을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반영한 단순한 구곡도가 아니라, 한 선비의 삶과 학문의 터전을 담은 기록화에 가깝다. 또한 18세기 진경산수화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오석기기자 sgt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