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거 어때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식당을 하면서 20여년 전부터 도시락 봉사를 해 왔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힘닿는 데까지 가벼운 걸음을 옮겨왔던 일이다. 나눔을 하다 보니 혼자 계시는 노인들을 찾아 말벗이 되어주는 일도 함께해 온 터다.
그런데 내가 받은 전화는 그걸 하지 말라는 정중한 충고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화력이 좋지 않은 노인들께 음식을 드렸다가 탈이라도 나면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다.
잠시 머리가 복잡했다. 주변에서 일어난 편하지 않은 결과들을 들은 적도 있고, 생각지 못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악몽 같은 사례들이 앞뒤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온전하게 정성을 기울인다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있고, 지금까지 무탈하게 해 온 일이기에 그만둘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좀 떨어진 시대인 듯하다. 젊은 사람의 편에서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단지 부모의 부양을 거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대가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노인들 역시,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이어간다는 생각이 강한 것을 보면 사회가 한꺼번에 변하는 것도 같다.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웃에 어려움이 생기면 무조건 달려가 도움을 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과 인사를 나누기는커녕 마주치는 일도 드물다. 시골도 다르지 않다. 담장을 넘어온 과일나무 한 가지 때문에 송사가 붙는가 하면 이웃을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고독사도 따지고 보면 이웃이 없어 생기는 일이다. 나는 그런 분들과 오래전부터 말벗이 돼 왔기에 극악한 경우를 더 가슴 아프게 느끼는지 모른다.
‘70세면 몸이 나를 따르지 않고 80세면 정신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 과정을 거친다. 설령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나이에서 오는 불편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불편한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감내하는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굳이 도시락 봉사에 몸을 담은 것도 그래서였다. 삶의 근간이 되는 것이 좋은 먹거리이고, 끝까지 보장받아야 마땅한 것이 영양식이라는 인식 말이다.
종종 밥을 태운다. 구수한 숭늉의 맛도 좋지만, 노인의 식단은 무른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도시락 봉사는 내가 선택한 오래된 사회봉사활동이다. 힘이 닿는 날까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일을 감내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