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유언비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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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③조선왕조와 가짜뉴스·完

◇ 영화 ‘사도(2015)’ 스틸컷.

영조(1724~1776)가 왕세자 이선(사도세자·1735~1762)을 뒤주에 8일 동안 가둬 아사(餓死·굶어 죽음)시킨 사건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마흔 둘, 늦은 나이에 얻어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죽게 만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사도세자의 끝없는기행과 평소 태도 등이 그 배경에 있지만 각종 ‘유언비어’가 마음을 흔들며 방아쇠 역할을 한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불러 온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1762년(영조 38년)에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 고한 ‘고변사건’이다. 나경언은 임금 가까이에 있는 환시(宦侍·임금의 시중을 드는 벼슬아치)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글을 형조에 올린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조는 이 내용이 엄중하다고 판단, 직접 나상언을 국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상언이 옷솔기에 몰래 숨겨온 흉서(凶書·반역이나 역모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글)를 보게 된다. 내용은 사도세자의 비행 10여가지를 세세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영조는 이같은 나상언의 행동을 칭찬하며, 다른 신하들에게는 왜 이러한 일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며 호통을 치기에 이른다. 영의정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만일을 생각해 관련 문서를 태울 것을 청하자 영조는 이를 수락해 관련 내용이 정확하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영조가 사도세자를 불러 추궁하는 과정에 관련 내용 몇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 영화 ‘사도(2015)’ 스틸컷.

후에 나경언은 자신의 한 말이 사도세자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백하고 처형까지 당하지만, 그가 전한 흉서에 영조는 확신 같은 것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조가 나경언의 글을 보고 사도세자가 진 빚을 갚으라고 명을 내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조는 “어제 내가 본 바가 있어서(나경언의 글이다) 내사(內司)와 사궁(四宮)에서 시인(市人·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빚이 많은 것을 알았다. 또 너희들이 억울함을 품은 일이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다 진달(進達·공문 서류를 상급 관청에 올려 보냄)하라”고 명한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4일) 사도세자에 대한 불신이 이미 깔려 있는 상태에서 나경언의 글에 있던 내용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확증편향은 더욱 강화된다. 나경언의 고변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도 실록에 기록돼 있는 사실이다. 급기야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재촉하기에 이른다. 사도세자의 자결을 여러 신하가 말리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고 깊이 가두라고 명한다.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으나 영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궁궐에서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유언비어를 전한 이가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진다.(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이어 윤 5월21일 결국 사도세자는 목궤(木櫃) 즉, 뒤주(실록에는 일물(一物)로 표현)에 갇혀 숨을 거둔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21일) 사도세자는 유언비어가 시발점이 돼 아버지, 어머니 손에 죽임을 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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