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메트로폴리탄 뉴욕 핫플의 어제와 오늘]프랑스가 만들어 기부한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11.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뉴욕의 넘버원 랜드마크, 자유의 여신상

아마도 뉴욕, 아니 미국하면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뉴욕과 미국에 대해 자유의 여신상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프랑스의 에펠탑, 브라질의 예수상,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등 세계 각지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건축물이 있는 것처럼 미국의 대표 건축물 하나를 꼽으라 할 때 아마도 이 독특하면서도 이국적인 여신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1882~83년 마무리 결합중인 자유의 여신상(자료: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크루즈 티켓은 맨해튼 다운타운 배터리파크(Battery Park) 안 매표소에서 판매한다. 보통 많이 이용하는 티켓은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Liberty Island)을 들러 앨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까지 다녀오는 항로로 구성된다. 뉴욕 초기 이민자들의 입국을 심사했던 연방이민국의 소재지 앨리스 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자유의 여신상은 그야말로 자유와 미래를 꿈꾸며 이국땅을 밟는 이민자들의 마음에 희망의 메시지를 불러일으키는 애잔함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 ‘대부(Godfahter)’ 속편 앞부분에서 어린 돈 꼴리오네가 홀로 입국하자마자 격리된 앨리스 아일랜드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꼭 이런 느낌이다. 지금은 그 빛이 많이 바래 언제 그랬던가 싶기도 하지만 미국을 자유의 나라로 꿈꾸게 하는 무언가가 이 거대한 여신상을 통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전해지고 있었던 듯하다.

사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뉴욕을 처음 찾는 관광객이나 미국 내 다른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이 관람의 주를 이룬다. 마치 서울 사람일수록 63빌딩이나 롯데타워 전망대를 잘 가지 않거나 제주나 속초 사람들이 한라산이나 설악산에 잘 오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서울 어디에서도 롯데타워나 63빌딩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제주나 속초 어디를 가도 한라산이나 설악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인, 특히 뉴요커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은 마치 늘 곁에 있는 자유의 숨결과 같은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맨해튼 남쪽 바다 한가운데 자그마한 섬에 우뚝 서 있는 이 조각상은 언제부터 어떻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일까? 왜 이름이 자유의 여신상이고 누가 어떤 동기로 만든 것일까? 처음 그 자리가 그냥 바다였다고 생각하면 이처럼 많은 궁금증들이 떠오른다. 이제 그 답을 정리하며 이 거대하고도 독특한 조각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씩 풀어가 보자.

자유의 여신상은 보통 ‘Statue of Liberty’로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여신상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미국에 보낼 선물로 만들어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치 낭만적이지만 150년전 당시엔 국가간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 물론 그때도 국익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19세기는 이렇게 정치 외적인 영역에서는 예술과 낭만, 문화적 자신감 등이 충만했던 시대였다. 프랑스 건축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Auguste Bartholdi)는 1865년 어느 날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디너 파티에 참석한다. 당시 프랑스의 저명 역사학자(Laboulaye)가 호스트였는데, 그날 밤 그의 연설에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에 결정적 도움을 준 데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기념물이 건축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 영감을 얻어 이 여신상 건축을 착안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독립선언문 서판을 쥔 여신상 왼팔 건축을 지휘중인 바르톨디(아래 왼쪽)(자료: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바르톨디는 이날 받았던 영감을 실제로 구현하려 노력한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상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미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서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건축을 추진한다. 미국이 조각상의 부지와 토대를 제공하고 프랑스가 조각상을 제작하여 기부한다는 약속 하에 드디어 바르톨디는 1875년 조각상의 디자인을 완성한다. 여신상은 위로 치켜든 오른손에는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횃불을,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고 적힌 독립선언문 서판을 들고 서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여신상의 얼굴은 바르톨디 자신의 어머니 얼굴을 모델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여신이 쓰고 있는 왕관은 7개의 빗살로 이루어지는데 횃불이 비추는 전세계 7개 대륙과 7개 대양을 의미한다. 여신상은 발로 부러진 족쇄를 밟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억압에서 풀린 자유를 표현한다. 여신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총 무게 225톤, 지면에서 횃불까지 93.5미터에 이르며, 왕관 부분에는 전망대를 설치되는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구조 (자료: New York City Yesterday & Today)

바르톨디는 여신상을 만들어갈수록 미국 독립일까지 기한 내에 완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단 만들어진 부분 부분들을 파리나 미국 등지에 먼저 전시하고, 모든 파트가 다 완성되면 이를 결합하여 완전체를 뉴욕으로 수송하기로 계획한다. 이에 따라 횃불을 든 오른쪽 팔은 1876년부터 필라델피아(Centennial Exhibition), 뉴욕(메디슨 스퀘어 파크) 등지에서, 청동 머리부분은 1878년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전시하는 식으로 부분적인 공개가 이루어진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또 하나 애를 먹였던 건 이 거대한 동상이 어떻게 뉴욕 항만 대서양의 세찬 바람을 견디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해결책은 에펠탑의 설계자로 유명한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이 제시하는데, 조각상 내부에 에펠탑 같은 철골구조물을 세워 거친 비바람에도 유연성 있게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즉 여신상은 하나의 통으로 이루어진 조각물이 아니라 외부는 얇은 청동판을 이어붙인 조각 표면으로 이루어지고 내부는 에펠탑처럼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철골 구조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물인 셈이다.

1878년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전시중인 자유의 여신상 머리부분(자료: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드디어 여신상은 1884년 2월 완성되어 7월 미국에 공식 기부하는 것으로 일정이 공식 발표된다. 일정에 따라 1885년 조각상이 214개 파트로 분해되어 뉴욕으로 이송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걸림돌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당초 제공키로 하였던 여신상의 토대(받침대) 제작이 지연되고 있던 것이다. 결국 퓰리처(퓰리처상으로 유명한)의 활약으로 모금이 빠르게 진행되어 1886년 10월 현재의 위치(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이 완성된다. 10월 28일 개축일에는 뉴욕시 5번가를 중심으로 수백만명의 인파가 모여들었으며 여신상 부근에서 300여대의 선단이 화려한 축하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여신상은 9.11 테러 직후 2차 테러 목표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미국 정부가 한동안 내부 관람을 통제할 만큼 미국인들의 애착이 큰 조각물이며, 워낙 오래되고 항상 거센 바람에 노출되다 보니 내외관 보수공사가 잦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 예술품에 가까운 거대조각상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국가 경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善)한 의지로 만들어져 기증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가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제공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착안부터 완공까지 20년 이상을, 각종 모금과 협업을 통해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순수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국가간 기부행사의 유물로서 이 여신상이 갖는 의미는 절대 폄하하기 어렵다. 그 의미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각별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지금처럼 각박한 각자도생의 시대에 앞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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