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74주년을 맞은 강원일보가 강릉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꼽히는 초허(超虛) 김동명 선생의 탄생 120주년(1900~2020년)을 앞두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선양하는 특별기획을 진행한다. 초허 선생은 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내 마음' 등을 발표해 한국 현대문학사의 대표적인 전원파 시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절필을 택한 저항시인이었고, 군사정권에 항거한 종교인이었다. 또 평생 교단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한 교육자였으며, 정치평론가로 또 정치인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릉군수 되길 바라셨던 어머니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서당 보내고
9세 때 신교육 받게 하려 원산 이주
1925년 일본행 니혼대 철학과 수학
일제에 대한 분노 표시로 붓 꺾어
1942년 '광인' 이후 광복 때까지 절필
1947년 월남 … 이 시기부터 정치평론
초대 참의원 당선됐지만 '5·16' 발발
초허(超虛) 김동명(1900~1968년) 시인은 1900년 2월4일(음력)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서 김제옥씨와 신석우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초허의 어머니는 배움은 짧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들이 '강릉군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를 노동리 서당에 보내 한학을 공부하게 했다. 아홉 살 되던 해인 1908년에는 가족 모두 함경북도 원산으로 이주한다. 어린 나이에 고향 강릉을 떠나게 된 것은 신교육을 받게 하려는 부모의 교육열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내가 이 다암에 커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나?(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반말을 썼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소 과대망상증을 가진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다. …(중략) “강능(강릉) 군수가 되어 주렴.” 이것은 어머니의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시리라.” -수필 '어머니' 中
원산에서 소학교를 나온 초허는 1921년 함흥 영생중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흥남에 있는 동진소학교와 평안남도 강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 당시만 해도 초허는 문학과는 큰 인연인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문학에 뜻을 둔 것이 1923년 무렵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초허가 비로소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친구 현인규를 만나고 나서다. 현인규로부터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빌려 읽은 초허는 크게 감동을 하고 1923년 10월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다. 그의 나이 스물네살 때다.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찬 이슬에 붉은 꽃물에 젖은 당신의 가슴을/붉은 술과 푸른 아편에 하염없이 웃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또 당신의 혼의 상흔(傷痕)에서 흘러 내리는 모든 고운 노래를…(후략)”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 中
초허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학원 신학과와 니혼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듬해 '조선문단'에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원산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습작시를 모아 등단 7년만에 첫 시집 '나의 거문고(1930년)'를 상재한다.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芭蕉(파초)'는 1936년 조광 1월호, 또 다른 대표작 '내 마음'은 1937년 조광 6월호에 발표됐다. 이 두편의 시는 '수선화' 등의 시와 함께 그의 두번째 시집 '芭蕉(1938년)'에 모두 실린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시 '芭蕉(파초)'
1942년 초허는 '술노래', '광인'을 마지막으로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절필한다.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이었지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한 일제에 대한 분노의 표시를 붓을 꺾는 것으로 몸소 실천한 것이다.
광복 이후에 그는 흥남중·여중 교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함흥반공학생의거(1946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교화소에 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광복 2년 후인 1947년 월남한다. 그해 세 번째 시집 '三八線(삼팔선)'을 발표하고 이 시기부터 여러 신문에 정치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취임한 초허는 시집 '하늘'을 발표했고, 조선민주당 정치부장(1948년), 민주국민당 문화부장(1952년)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영역으로도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1954년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에 시집 '眞珠灣(진주만)'을 펴내고 이 시집으로 제2회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초허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 '目擊者(목격자)'를 1958년 발표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정치평론집 '敵(적)과 同志(동지·1955년)', '歷史(역사)의 배후(背後)에서(1959년)', '나는 證言(증언)한다' 등을 펴내기도 했다.
1960년 서울에서 초대 참의원 선거에 나선 초허는 당선과 함께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나서는 듯했으나 다음 해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정치인으로서 펼치고자 한 포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인민을 위하는 마음, 진정으로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만이, 정치를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세상에 아무리 못돼 먹었기로, 철면피기로, 소위 정치를 한다면서 인민을 위하지 않노라고 양언할 부야 설마 있으랴마는, 여기서 우리가 인민을 위한다는 것은, 단지 혀로만 위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오, 진실로 인민이 바라는 것, 인민이 반드시 가져야 되는…(중략)…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바쳐 봉사하는 행위를 말함이다. 마치 탕(湯)임금처럼.” -정치평론집 '역사의 배후에서' 中
1960년대 중반 김동명문집 간행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초허가 그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사화집, 정치평론집, 수기·수필집을 총망라하는 김동명문집 간행이 진행됐다. 초허 김동명 시인은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1968년 1월21일 서울 남가좌동 자택에서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틀 뒤 그의 유해는 문인장으로 서울 망우리 문인 묘역에 안장됐다. 초허가 세상을 떠난 지 42년이 흐른 2010년 10월,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 사천종중은 유해를 모셔와 강릉시 사천면 노동하리 종중영원에 안치한다. 아홉 살, 고향을 떠난 초허의 102년 만의 귀향이었다.
오석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