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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앤스토리]“봉준호 누군지도 잘 몰랐다 … 작업해 보니 정말 디테일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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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서 공방 운영 박종선 가구디자이너

◇박종선 가구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중들을 위한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원주가 조선목가구의 허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주 귀래면에 있는 작업실과 영화 '기생충'의 출연배우와 스태프들이 박종선 가구디자이너가 만든 박 사장 집 거실의 메인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신세희기자

칸 황금종려상 영화 '기생충' 속 박사장네 가구 제작

올해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기생충'이 개봉 1주일 만에 관객 수 500만명(6일 현재)을 돌파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가족희비극이라는 다소 낯선 설명이 붙어 있는 이 영화는 허를 찌르는 전개와 상상력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장면장면마다 빠져들게 하는 봉 감독의 디테일한 설정과 연출에 감탄하며 그의 별명인 '봉테일'의 마술을 체험하게 된다. 반지하와 저택,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극과 극의 두 공간 중 박 사장네 저택의 호화로움을 극대화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가구'다.

영화 속 '봉테일'의 한 축을 담당한 저택, 그곳을 더 고급스럽게 만든 가구, 그 가구를 만든 박종선(50) 가구디자이너. 그를 영화 개봉일인 지난달 30일 원주 귀래면에 있는 그의 공방에서 만났다. 그가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

영화에서 그의 가구는 계급을 상징하기도 하고 한 공간에 머물고 있는 두 가족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최고의 디자인페어로 꼽히는 아트바젤·디자인마이애미에 작품을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박 디자이너와 영화 '기생충'의 뒷이야기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기생충'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기생충의 미술감독을 맡은 이하준 미술감독이 내 해외작품집을 우연한 기회에 보고 이를 봉준호 감독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3월 미팅에서 봉 감독이 내 가구 작품과 본인이 생각한 영화의 콘셉트와 맞는다고 했다. 사실 봉 감독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처음에는) 작품을 제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시나리오를 봤는데 실내 촬영이 많아 가구 소품의 비중이 높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허락했다.”

■어떤 작품을 제공했는지 궁금하다

“극 중 부자인 박 사장 집 내부에 놓인 가구들이다. 거실의 메인테이블과 부엌의 다이닝테이블은 봉 감독이 주문한 대로 만들었다. 기간은 한 달 정도 걸렸다. 나머지는 전부 내 작품을 그대로 제공했다. 부엌이었나(박 디자이너는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 그곳에 놓인 의자와 조명, 박 사장의 딸 다혜와 기택의 아들 기우가 공부할 때 쓴다던 테이블과 의자 등이다.”

■봉 감독이 박 디자이너의 작품을 원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다른 가구보다 세련된 점에 끌리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금 나쁘게 그려지는 부자들과 달리 박 사장 가족들은 순진하고 착하지만 허영기는 좀 적은 걸로 알고 있다. 난 간결함을 추구한다. 의자 하나만 봐도 얇고 단단하다. 아마 이 지점에서 봉 감독이 내 작품을 보고 본인의 영화 콘셉트와 맞다고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봉 감독은 정말 디테일한 사람이다. 가구 소품에까지 어떤 의도를 담으려 했다.”

■촬영장에 가 봤나

“세트 촬영장에 가 봤다. 누군가를 엿볼 수 있는 구조의 집이었다. 이걸 참고해 '등잔 밑이 어둡다. 전혀 속을 것 같지 않지만 속는다'의 개념으로 거실 메인테이블을 만들었다. 여러 조각의 판을 쌓아 올렸다. 각도를 달리하면 거실 바닥이 보이고 또 안 보인다. 아, 난 영화를 아직 안 봤다.(웃음)”

■작품을 만들 때 영감은 어디서 어떻게 얻나

“이곳에서 멀지 않는 거돈사지다. 원주 귀래에 머물며 작업하는 가장 큰 이유다. 거돈사지가 날 이곳으로 불렀다. 정말 많이 비어 있는 곳이다. 남은 것이 석탑과 대웅전 기단 정도다. 나머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캔버스가 된다. 내 작업 프로세스에 영향을 줬다. 거돈사지에서 얻은 나만의 방법이다.”

■충북 제천이 고향으로 알고 있다. 원주에는 언제 오게 됐나

“부모님 따라 10살 때 처음 원주에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미술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도 굉장히 포괄적으로. 1980년대 중후반에 처음 미술학원에 다녔다. 학교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할 때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다이내믹했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작업 과정도 남다르다고 들었다

“난 처음에 도면을 그리지 않는다. 스케치 후에 바로 미니어처를 만든다. 10분 만에. 비율은 무시한다. 일단 미니어처를 만들고 실물 크기의 작업에 돌입한다. 도면은 맨 마지막 단계에 만든다. 작업이 70% 정도 진행된 상황에 더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즉흥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즉흥이 아니라 직관이다. 즉흥은 갑자기 생각난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지만 직관은 내면 속 감춰진 걸 끄집어내 작품에 적용하는 것이다.”

■아트바젤·디자인마이애미에 출품해 해외에서 인정받았다고 하던데

“디자인페어인 디자인마이애미는 세계 톱페어로 보면 된다. 해외에 내 고객이 꽤 있다. 돈과 함께 안목을 가진 전 세계 0.1%의 사람들이다. 최근에 휴고보스 독일 회장이 침대를 주문했길래 만들어 보냈다.”

■해외에서 박 작가의 작품이 인기 있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서양은 채움이 기본 철학 사상이다. 우리는 비움이다. 동양화를 봐도 땅이 없는데 나무가 그려져 있다. 서양인들은 이런 낯섦을 좋아한다. 그리고 디자인페어에 출품된 가구작품을 보면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디자인의 가구가 많다. 가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가구는 사람이 편안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을 위한 가구를 만들 생각은 없나. 볼수록 탐이 난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중들을 위한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현대적인 조선목가구를 대중들에게 선보이려면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원주시장도 만나봤고 경제계 인사도 만나봤지만 자력으로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주가 조선목가구의 허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박 작가에게 가구란 무엇인가

“자꾸 멋을 붙이고 형이상학적인 형태를 띠는 것을 경계한다. 500년 된 조선목가구는 시간을 뛰어넘는 디자인과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다. 내 디자인과 가구가 가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김대호기자 mant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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