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문화재로 보는 우리 역사]제사 때 소를 잡게 해달라 금령에도 불구 `허락' 눈길

4. 노비 `연분'의 소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이 벌벌 떨면서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불쌍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 이 일로 백성들은 소를 아껴 양으로 바꾼 왕을 인색하다고 여겼다. 이에 맹자는 왕이 어진 마음으로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달래면서 소에 대한 어진 마음을 백성에게 미치게 하라고 했다.

이렇듯 예부터 소는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귀하게 여긴 소중한 재산이었다. 농업을 장려한 조선시대에는 소를 잡는 일을 금했다.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소나 말을 사사로이 도살한 자는 장 백 대를 치고 삼년 간 노역에 종사시킨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 혼인 잔치나 장례와 제사 때 소 잡는 것을 엄히 금했다. 다산 정약용은 '속대전'의 장 백 대를 오십 대로 낮추고 가죽, 힘줄, 뿔로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관에서 소 잡는 것을 속전을 받아 허가를 해 주었다. '목민심서'에 서울은 28냥, 지방에서는 42냥을 속전으로 받았다 한다. 다산은 속전을 받는 것은 관리의 비행을 조장한다 하여 금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1904년 강릉 옥계면 산계리 유주사 집 노비 연분(年分)이 주인을 대신해 올린 소지(所志·관에 진정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민원서)가 있다. 상전 댁 시향(時享·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에 소를 잡아서 올리려 하는데 금령(禁令)과 관계되므로 특별히 소를 잡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본문 아래에는 관에서는 이를 허락한다는 처결이 적혀 있다. 유주사 집은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령에도 불구하고 관에서는 이를 허락할 만큼 가세(家勢)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40여량의 속전을 냈을까? 가죽과 힘줄, 뿔로 대신 바쳤을까?

<김동우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제작연 도 : 1904년

■소 장 처 : 국립춘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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