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개혁의 선구자였던 정치의 큰 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관철시켜
지방자치 확대·금융실명제 등 큰 족적 남겨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그를 따라 영면의 길로 떠났다. '거산'(巨山) 김영삼과 '후광'(後廣) 김대중'의 '양 김 시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전 대통령의 사망에 각계각층에서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민주화와 개혁의 정치사를 장식하며 YS란 애칭으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이다. 국회의원 9선, 야당 대표 3번, 원내총무 5번, 대변인 2번, 특히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문민정부'를 이끌며 각종 개혁을 거침없이 단행했다. 민주화와 정치 개혁의 선구자였던 정치의 큰 별이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여 년간 한국 정치사의 주역이었다. 유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군사정권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당시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적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후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서민적인 칼국수로 대변되었던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성역 없는 사정을 보여 줬다. 비록 임기 때 경제 위기에 대한 실책으로 IMF 구제금융을 초래하고 차남 김현철씨가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민주화와 정치개혁에 기여한 그의 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환골탈태해야 한다. 정의와 인권, 이해와 화해 등 소중한 가치가 반영되는 민주국가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다. 공직자들의 비리를 차단하고자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 도입을 위해 솔선수범한 것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했고 이에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가 자리 잡는 기틀이 마련됐다. 또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자치제도를 확대해 1995년 7월부터 특별시와 광역시직할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까지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국민의 마음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금의 정치권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로도 유명하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는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그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역사 속에 묻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도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