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유교적 여성상 극복하고 삶을 스스로 개척한 여인”

'신사임당' 전문가 지상좌담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년)은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였다.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는 사임당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유성선 “매사 공평 … 전인교육의 모범 실현한 조선 초 실천적 교육자”

정문교 “율곡 선생 母 강조되면서 사임당의 재능·예술혼 이미지 축소”

정성희 “당대엔 산수화가로 큰 명성 … 모성·부덕의 상징 후대에 형성”

-우리 현실적 삶에서 제기될 수 있는 근본적 철학들과 연계해 신사임당이 추구한 효행과 예술 정신은 무엇인가요

유성선 강원대 교수=오늘날 신사임당은 예술인으로서, 율곡과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 자식으로, 남편을 성심껏 내조한 현모양처로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여성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현대적 의미로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전통가치관인 효는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신사임당은 일찍이 유교의 경전에 통달하여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특히 기품있는 가문과 문향으로 이름난 강릉에서 자라났다. 더구나 자신의 아호를 사임당이라 지은 배경에서도 사임당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몸소 실천하며 가르침에 엄격했으며, 사임당이 당시 사대부 부인들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내훈'을 즐겨 읽어 모두 암송한 것으로 보아도 태교에서부터 양육에 이르기까지 몸소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임당이 자녀 4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이름난 학자요 철인으로 그리고 예술가요 뛰어난 부덕을 함양한 여인으로 길러낸 것을 보면 사임당의 모습과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임당은 그 천품과 자질이 순정하고 효성이 지극하면서도 매사 공평한 어머니로서 전인교육의 모범을 실현한 조선 초기의 실천적 교육자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초충도는 대부분 사임당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친근한 소재와 섬세하면서도 정감 있는 사임당의 표현기법은 조선 초기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은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조선 초기뿐 아니라 한국미술사에 있어서도 신사임당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우리나라 초충도의 선구자이며 최고로 손꼽히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는 너무 작아 잘 볼 수도 없는 미물과 보잘 것 없고 결코 미적 대상물이 아닌 소재가 등장한다. 이는 미물에까지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임당만이 가질 수 있는 '인(仁)의 마음'인 것이다. 이 '인(仁)의 마음'은 만물을 감싸고 배려하는 사단지심의 본체이며 사랑의 원리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의 움직임에서 자연의 섭리 및 생명의 경이로움을 몸소 실천했기에 가능한 그림세계였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이렇게 생명의 경이로움과 소박미, 그리고 여성다운 섬세함이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예술정신이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을 다시 보기 위해 무엇을 살펴야 봐야 하나요

정문교 율곡평생교육원장=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우리는 신사임당을 앞세운다. 여기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업적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사임당의 재능과 예술혼, 교육자로서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축소된 면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의 어머니이기에 위대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의 시대상이 다만 정숙하고 현숙한 여인의 이미지만 칭송하고 그 이미지만을 지속적으로 부각해온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신사임당이 태어나 살았던 시대는 조선이 개국하고 100여년 후부터 시작된 1498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신사임당이 태어난 해인 1504년 갑자사화 그리고 1545년 을사사화까지 1551년에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은 이 시대를 몸소 지켜보고 그 혼란과 갈등의 격랑을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권문세가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그칠일이 없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가치관의 혼란이나 사회동요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어려웠던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여성의 몸으로 시대의 질곡을 깨치며 은근히 천시되던 여성의 지위를 세상이 놀랄 정도로 뒤바꿔 놓은 여인이 신사임당이다.

우리는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율곡을 비롯한 7남매의 학문의 기초를 잡아주고 스스로 그림과 글씨, 자수를 익히고 시문을 남긴 의지와 불굴의 여인, 그리고 시대를 앞서 미래를 준비한 여인 신사임당이 남긴 지행(知行)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자신에게 놓인 환경과 여건을 굳센 의지와 실천으로 이겨내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어야 한다.

신사임당은 현숙하고 시대에 순종만 한 나약한 이미지의 여인이기보다 의지와 소신의 여인, 용감하고 강건한 여인이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婦德)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보다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이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모성과 부덕의 화신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물론 사임당이라는 당호에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고 일컬어지는 태임(太任)을 본받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때문에 사임당 스스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고 싶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함과 동시에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면서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더욱이 율곡이 후대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 화가로서의 유명세보다 그를 낳은 어머니로 만인의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에서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당대에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런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고, 따라서 화가라는 자기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됐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긍정적 측면이 있으나, 한편으로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했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은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는지, 그녀의 부덕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김상태기자 stkim@kwnews.co.kr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