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붓 대신 곡괭이, 위대한 리얼리스트… ‘광부 화가’ 황재형 영면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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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년 74세로 타계한 정통 리얼리즘의 거장 황재형 화백
-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으로 증명한 참된 예술가의 궤적

“너무 편안한 잠자리를 이루고 있어 삶이 권태로운 사람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그림을,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드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을 주는 그림을 그리겠다.”

중앙대 미술대학 졸업을 앞둔 한 청년의 굳은 다짐은 평생토록 변치 않는 예술적 신념이 됐다. 평생을 강원도 태백의 캄캄한 막장과 척박한 폐광촌에서 보내며, 가장 소외되고 핍박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낸 한국 민중미술의 1세대 거장이자 정통 리얼리즘의 대가 황재형 화백. 그가 2월 27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치열하고도 숭고한 예술이었다.

◇고 황재형 화백. 강원일보 DB

◇ 구경꾼이기를 거부하고 갱도로 걸어 들어간 화가

1952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황재형 화백은 유년 시절 갯벌에 나무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미술에 눈을 떴고, 1982년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80년대 초, 그는 이종구, 송창 등과 함께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 동인인 ‘임술년’을 결성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교 3학년이던 1981년에 그린 대작 ‘황지 330’이었다. 1980년 황지탄광 매몰 사고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광부의 낡고 헤진 작업복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1982년 제5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며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오히려 청년 화가에게 지독한 부채감과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황 화백은 훗날 회고전 인터뷰에서 당시의 뼈저린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광부들 삶을 그냥 소재로 쓴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구경꾼, 사기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치열한 성찰은 그를 안락한 화실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82년 가을, 그는 아내 모진명씨와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미련 없이 태백으로 향했고, 붓 대신 곡괭이를 쥔 채 스스로 일용직 노동자이자 광부가 되었다. 예술이 삶을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이 예술을 통과하도록 온몸을 던진 것이다.

◇황재형 作 '식사 Ⅱ, 1985'

◇ 캄캄한 막장 속에서 피어난 연대와 진실의 예술

하얗고 긴 손을 가진 미대 출신의 청년이 막장의 가혹한 노동을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탄광에 들어갔을 때는 광업소 사장이 보낸 프락치로 오해받아, 동료 광부들에게 폐갱도로 끌려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재봉사였는데 사장 부인과 바람이 나서 도망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경제적 빈곤 역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쌀이 떨어져 끼니를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동료 광부들이 몰래 놓고 간 쌀과 돈으로 생활고를 버텨내며 그들과 진정한 이웃이자 동료로 거듭났다.

열정적인 광부 황재형을 멈춰 세운 것은 육체적인 한계였다. 갱도 안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어 콘택트렌즈를 낀 채 석탄을 캐야 했고, 렌즈와 안구 사이에 탄가루와 돌먼지가 엉겨 붙으면서 심각한 만성 결막염을 앓았다. ‘너구리’라 불릴 만큼 충혈되고 검게 그을린 눈과, 지병인 허리 디스크 재발로 인해 결국 3년 만에 갱도에서 나와야 했지만, 뼛속까지 새겨진 막장의 경험은 평생의 작업에 지울 수 없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의 처절한 경험은 1985년작 ‘식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앞사람의 헤드랜턴 빛에 의지해 쭈그려 앉아 밥을 먹는 광부들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 앞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들 중 내가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선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해야 그나마 내 밥이 보입니다. 막장에 갇힌 시간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 식사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생사가 엇갈리는 막장 속에서 동료의 밥을 비춰주는 불빛은 인간의 숭고한 존엄이자 연대였다.

◇고 황재형 화백. 강원일보 DB

◇ 흙과 석탄, 머리카락으로 빚어낸 혼(魂)의 조형 언어

황재형 화백이 한국 미술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은, 리얼리즘을 단순한 모사(模寫)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재료의 물성(物性)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진실에 다가갔다는 점이다. 그는 값비싼 유화 물감 대신 탄광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흙과 백토, 석탄을 화폭에 직접 짓이겨 발랐다. 캔버스 역시 낡은 합판이나 버려진 철망을 사용하며 탄광촌의 척박한 현실을 거친 질감으로 증언했다.

2010년대에 이르러 그는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매체인 ‘머리카락’을 예술의 재료로 선택하며 세상을 경악시켰다. 태백 일대의 미용실에서 수거한 수십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캔버스에 붙여 탄광촌의 인물과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 그리고 동시대의 모순을 그려냈다. 머리카락으로 완성한 대작들을 선보인 전시에서 그는 그 숭고한 의미를 이렇게 웅변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이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입니다. 그토록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어떻게 이처럼 평등한 머리카락이 태어났죠. 머리카락은 우리네 현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징표이자 귀히 여길 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 물감 대신 캔버스에 한 올 한 올 심어 넣은 머리카락은 단순한 조형을 넘어, 고된 노동의 시간을 물질로 전환하고 짓눌린 생명력을 부활시키는 경건한 의식(儀式)이었다.

◇2016년 5월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박수근미술상 시상식 모습. 강원일보 DB

◇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과 예술가가 짊어진 묵직한 책임감

가장 낮은 곳에서 핍박받는 이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듬은 황재형 화백의 미학은, 평범하고 소박한 이웃을 그렸던 국민 화가 박수근 화백의 예술 혼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다. 2016년, 강원일보사와 동아일보, 양구군은 박수근 화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박수근미술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황재형 화백을 만장일치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그가 고집스럽게 추구해 온 '토착적 리얼리즘'이 박수근 화백의 길과 가장 닿아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오랜 세월 언론과 화려한 조명을 피하며 묵묵히 태백의 산야를 걷던 그는, 시상식 단상에 올라 진솔하고도 묵직한 소감을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예술이 시대 앞에서 가져야 할 흔들림 없는 태도가 묻어났다.

“예술을 상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분명 격려가 되고 큰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상을 주신 분들의 기대에 걸맞게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더욱더 책임 있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이러한 책임감은 그가 강연 등에서 후학들에게 자주 당부했던 ‘복궤(覆櫃)’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삼태기 하나의 흙이 우습게 보이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쌓다 보면 산도 만들 수 있듯이 우리가 예술을 하는데 있어서 삶 속에서 자신의 진실성을 붓다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해 낼 수 있습니다.” 흙 한 줌의 절실함, 땀 한 방울의 무거움을 캔버스에 겹겹이 쌓아 올린 그의 철학이 응집된 멘트다.

◇황재형 作 ‘아버지의 자리’

◇ 캔버스 밖으로 이어진 리얼리즘, 약자를 향한 무한한 연대

황재형 화백의 예술은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1990년대 초, 태백의 한 낡은 사택에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짐승처럼 방치된 장애 소녀를 목격한 황 화백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살이 썩어가는 악취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를 본 그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답을 못하는데 노동자 권리회복을 부르짖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치열한 내적 갈등 끝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교육에 나섰다.

그는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을 모아 아이에게 글과 산수, 미술을 가르쳤고,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휠체어와 수술비를 마련해 주었다. 이 작지만 강렬한 연대는 씨앗이 되어 독일 시민단체의 후원을 이끌어냈고, 장애아 교육센터인 ‘태백 사랑의 집’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술은 도덕성의 회복”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넘어 지역 사회의 소외된 생명을 구하고 이웃의 상처를 직접 꿰매는 삶 그 자체로 진정한 의미의 리얼리즘을 실천했다.

◇고 황재형 화백. 강원일보 DB

◇ “쥘 흙은 있어도 뉠 땅은 없는 자들의 영원한 기록자

황재형 화백은 시대가 변하고 탄광이 문을 닫아 폐광촌에 카지노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에도 묵묵히 붓을 놓지 않았다. 은퇴 후 진폐증을 앓는 늙은 광부의 깊은 주름을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아버지의 자리’를 통해,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짊어져야 했던 희생과 국가 폭력의 모순을 서늘하게 고발했다. 바이칼 호수의 깊은 침묵을 흑연으로 묘사한 ‘알혼섬’과 장엄한 ‘백두대간’의 풍광 속에서도, 자연과 하나 된 인간의 처절한 역사를 담아냈다.

“쥘 흙은 있어도 뉠 땅은 없는” 서민들의 고달픈 삶. 황 화백은 타인의 불행을 값싸게 동정하거나 소비하는 예술을 철저히 경계했다. 타인의 아픔에 무임승차하지 않기 위해 눈의 핏줄이 터지도록 머리카락을 캔버스에 붙이고, 차가운 겨울 갱도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광부가 되었던 위대한 실천가 황재형. 비록 그는 자신이 그토록 껴안았던 태백의 깊은 산세보다 더 깊은 영면에 들었지만, 그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회천(回天·하늘을 되돌리다)’의 빛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밤하늘을 영원히 밝힐 것이다. 불편한 자들에게는 가장 따뜻한 안식을 주겠다던 젊은 날의 약속을 온 생애로 지켜낸 그에게 깊은 애도와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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