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흔들리죠?”
의사가 보여준 모니터에는 무서우리만큼 불안하게 흔들리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떨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 같았다. 현진이 고속 카메라가 달린 검은 고글을 쓰고 의사가 이끄는 대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고, 앉았다 누웠다 여러 자세를 취하여 얻은 결과물이었다. 세상이 자신만 빼고 휙휙 돌아가는 것 같아 병원에 온 것이었는데, 의사는 그녀를 고글 안에 가둬 놓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향으로 돌리며 더 정신없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화면에 가득 찬 요동치는 눈동자들이 현진은 결코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기이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환자분께서 어지러운 것은 몸의 균형에 관여하는 귓속 돌조각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반고리관을 흘러 다니기 때문이에요.”
의사가 피곤한 눈으로 현진을 보며 말했다. 돌이 이탈하는 원인은 명확하지 않고 2주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녹아서 없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현진은 입안으로 올라온 신물을 목구멍으로 다시 넘기며 의사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고개를 가만히 왼쪽으로 돌려 십여 분을 유지하고 오른쪽으로도 반복한 후 일어나 앉았다. 마지막으로 고글을 벗고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이십 분을 기다렸다. 빙빙 돌던 세상이 조금씩 멈춰지는 것을 느꼈다. 이 짧은 기다림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흔들렸던 거였다. 몸이 서서히 이완되면서, 시달리느라 명치 아래 어딘가에 눌려있던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에 오기 전, 현진은 권 대리의 문상을 다녀왔었다. 이른 아침부터 장례식장을 찾게 된 것은 연락도 되지 않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석훈 때문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걱정인지 분노인지 모를 불안을 안고 그를 기다리다 밖이 희붐해질 무렵 집을 나왔다. 시월 말의 아침은 제법 쌀쌀해서 그 와중에 우습게도 따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몽롱하게 가라앉은 시간 사이로 전날 퇴근 무렵에 받은 권 대리의 부고 문자가 떠올랐다. 뜻밖의 소식에 회사가 뒤숭숭했지만, 업무지원팀을 제외한 대부분 직원은 다음날로 조문을 미루며 퇴근하느라 바빴다. 현진도 권 대리가 죽은 경위를 듣고는 첫날부터 문상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현진의 집에서 걸어서 이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조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같아 현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타인에 대한 예의를 깊이 생각할 만큼의 힘은 없었다. 권 대리 부인의 얼굴은 어두웠으나 슬퍼 보이진 않았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는 흩날리는 잔 머리카락 없이 단정했고 얇은 입술은 옅게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검은 저고리의 흰 동정만이 과하게 창백했다. 현진이 들어서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오전 일곱 시 반 경이었다. ‘모르는 젊은 여자’가 이른 아침부터 문상을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현진이 회사 동료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권 대리 부인은 그제야 조금 경계를 푸는 듯했다. 가늘게 피어오르다 흩어지는 향불 뒤로 권 대리가 이가 보이지 않게 살짝 웃고 있었다.
권 대리는 회사 근처 다세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주택가 도로변에서 전날 새벽녘에 발견되었다. 새벽예배를 가던 행인이 발견했는데 의식불명 상태였고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회사 사람들은 그가 그 주택가에서 죽은 것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주택가에 ‘그 여자’가 살았다. 그러니까 어떠한 짐작을 누구나 하면서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권 대리는 그 여자에게 미쳐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도 아닌 시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갈 정도로 빠져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게 되지 않나.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의심하면서. 현진은 육개장에서 고사리인지 대파인지 모를 뭉개진 채소를 젓가락으로 건져 입에 넣으며 주방 앞에 앉아있는 권 대리 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슬픔이 아닌 침울함에 절여있는 얼굴을. 육개장의 미지근한 온도가 허기를 쫓았다. 현진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자리에 다시 앉아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리니 곧 가라앉았다. 식당 입구에 섰을 때 권 대리 부인이 배웅하러 다가왔고, 현진은 그녀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어둠은 모두 가시고 햇살만이 아침 공기를 가르고 있었지만, 현진은 속이 울렁거렸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이십 분이 지났는지 간호사가 현진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가만히 만졌다. 현진은 눈을 떴다. 더 이상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속은 계속 메슥거렸다. 병원을 나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석훈이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박 과장이 일이 생겨 대신 숙직 선다고.”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전화했었어? 언제?”
“새벽 내내 했는데. 확인해 봐요.”
“안 왔는데?”
“그럴 리가.”
“……, 됐다.”
석훈은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현진은 석훈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차가운 숨소리에 그날의 출근길 감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주 전 아침이었다.
“여기 누가 탔었어요?”
현진은 차 조수석에 앉아 등과 엉덩이를 들썩였다. 좌석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각도와 간격이었지만 불편했다. 오른손을 아래로 뻗어 좌석 조절기를 만지며 원래의 위치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석훈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휴대전화에서 내비게이션 앱을 켜놓고 미간을 좁히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 밑 살이 두어 번 실룩거렸다.
“왜 말을 안 해요?”
“왜 그래애, 회사 사람 누군가 탔었겠지.”
석훈은 그제야 현진을 보고 웃고는 시동을 걸었다. 소년처럼 해사한 얼굴이었다. 현진이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그의 옆자리,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좌석 위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벨트를 맸지만 차가 달리는 내내 등과 엉덩이가, 무언지 모를 마음이, 불편했다.
권 대리의 사인은 외부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그가 발견된 장소에는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었다. 도로 연석에 그의 혈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취중에 발을 헛딛고 그 위로 넘어졌을 거라는 것이 경찰의 1차 조사 결과였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업무지원팀이 회식을 했고 그가 취한 채 2차를 간다며 혼자 어디론가 갔다고 직원들이 증언했다. 권 대리 부인은 부검을 원하지 않았다. 경찰을 믿었거나 남편을 믿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권 대리가 죽은 후, ‘그 여자’는 마치 자신이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듯 회사에서 사라졌다.
현진은 여직원 휴게실에 있는 그 여자의 옷장을 열어보았다. 언제 와서 치웠는지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해 연말쯤이었다. 권 대리가 여직원 중 가장 선임인 현진을 찾아와 그 여자가 옷장 하나를 쓸 수 있도록 부탁했었다. 여분이 없다면 새로 사겠다고. 현진은 여직원들의 의견을 물었고 그들 대부분은 얼굴을 구기며 반대했다. 회사 사람도 아닌 청소 아줌마와 같은 공간을 쓰는 게 말이 되냐고. 현진은 여직원들을 설득했다. 여자는 새벽 다섯 시에 출근해서 오후 서너 시경에 퇴근하니 우리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옷장 하나 들어갈 자리만 조금씩 양보하자,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자, 라고. 이틀 후 여직원 휴게실에 그 여자의 옷장이 들어왔고 테이블 한편에는 네스카페 커피 머신이 놓였다. 권 대리의 답례였다.
그 여자는 청소 용역 직원 중 유일하게 삼십 대였고 회사 근처 주택가에서 살았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오륙십 대의 여자들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구시가지에서 온다고 했다. 현진은 일부러 오후 세 시 반경에 휴게실로 가 캡슐 커피를 내렸다. 여자가 퇴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었다. 여자의 몸은 아랫배에 군살도 없이 탄력 있어 보였다. 운동으로 관리하는 듯했다. 여자는 현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고왔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감사해요, 옷장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는요. 권 대리님 참 섬세하시죠.”
현진은 이 말을 하며 그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유의미한 표정의 변화를 기대했지만, 여자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네, 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색바랜 하늘색 작업복을 벗고 흰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은 모습이 이십 대 후반처럼 보였다.
현진은 여자의 빈 옷장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머신은 진즉에 누군가가 말없이 화장실 앞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직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권 대리와 그 여자에 대한 말들을 쏟아냈다. 간혹 진실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했을지도 모를 추측성의 말들을. 현진은 당사자가 없는 뒷이야기에는 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지루하면 다른 사람의 유쾌하지 않은 사생활이 궁금할까, 하며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여직원들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증폭해서 들려왔다. 권 대리의 죽음, 정확히 말하자면 권 대리의 죽음 즈음 자신의 일상에 감지된 미세한 균열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기의 삶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였다.
“권 대리님이 그 여자에게 돈을 꾸어줬다는데요?”
“아, 뭐야, 결국 그런 거였어.”
“권 대리든, 그 여자든, 착실해 보였는데.”
“그런 사람들이 더 성실해. 나름의 채무변제랄까.”
여직원들은 낮은 소리로 말하면서도 톤은 들떠있었다. 현진은 옷장 문 안쪽에 붙은 거울 앞에 서서 코랄색 립글로스를 오랫동안 덧칠했다.
석훈의 외박에 대해 현진은 그날 통화 이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진으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석훈의 휴대전화 통화기록도 확인하지 않았다. 석훈도 굳이 보여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같다. 겨우 가라앉은 먼지 앞에서 재채기는 참아야 한다. 먼지는 젖은 걸레로 조용히 닦아내면 된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옆자리, 조수석은 누구나 앉아 간격을 조절할 수 있고, 그는 그날 박 과장을 대신해 숙직을 섰다. 그뿐이다. 현진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자마자 컴퓨터로 들어갈 듯 롤 게임에 빠져든 석훈을 바라보며 뿌연 생각들을 가라앉혔다. 석훈은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퇴근 후에는 집에서 PC 게임을 즐겼다. 롤드컵에서 페이커 팀이 우승한 후 더욱 롤에 열광했다. 현진은 석훈의 그런 단순함을 사랑했다. 마음에 들어오기만 하면 무엇에든 푹 빠지는 그 단순한 열정을. 하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득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을 저울질하는 자신과 달리 기쁨에만 매달릴 줄 아는 그를.
현진은 대학원 졸업 후 국립환경연구원에 연구 인력으로 지원했으나 두 해를 연속으로 떨어졌었다. 겨우 서울 끝자락에 걸친 사립대 이학석사 학위로 나라의 녹을 먹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카이 출신 석박사나 유학파가 넘쳐나는 분야였다. 사설 환경연구소들은 석사를 우대하되 학사 졸업자와 같은 연봉을 제시했다. 현진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마저도 감사한 일이었다. 국립은 포기하고 제법 규모가 있는 사설 연구소에 들어가 강북 사업소 수질분석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대기환경을 전공했는데 수질분석팀에 배치된 것이 의아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선임연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연구소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익혀야 했다. 석훈은 현진의 사수였다. 그는 의뢰받은 시료들이 밀려있다며 현진이 출근한 첫날부터 일을 가르쳤다. 맑은 봄날이었지만 실험실은 어둑했다.
“시료는 방해 물질을 제거하는 전처리를 해줘야 해요.”
흰 니트릴 장갑을 양손에 끼고 백 밀리리터 매스실린더에 시료를 정확히 따르는 석훈의 얼굴은 증류수 같았다. 빛이 산란 되지 않는 순수한 물의 표정 말이다. 무표정한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맑을 수 있나. 현진은 심장의 박동이 귀에서 느껴졌다. 석훈이 염산 시약병을 두 손으로 잡고 비커에 따를 때 실험대 선반 위에 놓여있던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는 액정 화면을 흘깃 보더니 움찔했다. 순간 그가 쥐고 있던 염산 시약병이 비커를 밀었고 현진이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 비커를 잡았다. 현진은 손에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석훈이 따르고 있던 염산이 현진의 왼손등으로 흘렀다. 선반 위에서는 그의 휴대전화가 계속 떨며 조금씩 움직였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침착하게 염산을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곧 현진의 왼손을 잡고 손등 위로 증류수를 쏟아부었다. 실험실 바닥이 물로 흥건해졌다. 석훈이 증류수 병을 더 가져와 현진의 손등에 연속해서 부었다. 휴대전화는 끈질기게 징징댔다. 현진의 손등에 증류수를 쏟으면서도 석훈의 모든 감각은 그 진동 소리에 집중하고 있음을 현진은 알았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진한 염산이 잠시 머물다간 현진의 손등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쓰렸다. 진동 소리는 멈추었고, 그제야 석훈은 그나마 질산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순간 현진은 베이고 말았다. 뒤늦게 몰려온 통증을 애써 감추며 산란된 그의 표정에.
일이 밀려 퇴근도 못하고 있던 그해 늦가을 저녁, 현진은 시약 창고에 시약을 찾으러 갔다가 그 안에서 석훈을 보았다. 그는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그에게 안겨 뒷모습만 보였던 사람이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석훈의 옛 사수, L의 목소리였다. L은 얼마 전 수줍어하며 청첩장을 돌렸었다. 현진은 확신했다. 석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손등에 염산 자국을 남기게 했던 사람은 분명 그녀였을 거라고. 어긋나 흘러버린 자리가 자신의 손등에 붉게 새겨진 거라고. L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연구소로 이직했다. 그 빈자리를 현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초점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석훈을 보면 그는 L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겨울 석훈과 결혼한 후, 현진은 몇 차례의 고충 처리를 넣은 끝에 강남에 있는 본사로 옮겼다. 함께 일했던 이들의 시선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그녀를 보며 L을 떠올린다는 것을 읽어야 했으므로.
권 대리는 눈 그늘이 짙은 얼굴에 잘 웃지도 않아 까칠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곤 했다. 그는 물품구매도 담당했기에 현진이 실험 자재의 구매를 의뢰하며 겪은 바로는 말없이 온화한 타입이었다. 그는 어느 시점에선가 자주 웃기 시작했는데 눈 밑의 그늘이 옅어진 것도 같았다.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마음은 얼굴은 환하게 하지만 귀는 멀게 했다. 회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그만 듣지 못했다. 본사 송년 파티에서는 해마다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협력업체들과 함께하며 동반성장을 외쳤다. 지난해 송년 파티에 그 여자가 왔었다. 권 대리가 미화반장과 함께 그녀를 청소 용역 직원 대표로 데리고 온 모양새였지만 직원들은 청소 용역 업체도 협력업체인가 하면서 이죽거렸다. 그때만 해도 현진은 말 수 없는 권 대리의 눈 밑 그늘을 신뢰했다. 삶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은 함부로 타인과 마음을 가볍게 나누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자에 대한 그의 호의는 일종의 연민이었으므로 입술에서 두 사람을 뱉어내며 한없이 가벼워지는 호사가들을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여자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자신을 깨닫고는 혼자서 코웃음을 쳤다.
현진은 그 여자와 휴게실에서 자주 마주치며 그녀가 서른일곱,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없고 남편이 롤 게임에 빠져있다는 것도 같았다. 단지 그녀의 남편은 출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술에도 빠져있다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현진은 그 옅은 미소에서 어떤 무게를 느꼈다. 시시포스의 바위 같기도 하고 소파 밑에 웅크린 먼지 같기도 한.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가요?”
“주민센터에 가서 운동해요. 아무 생각 없이 운동에 몰입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정말 행복해 보였다. 현진이 여자에게서 발견한 것은 어떤 부정한 것의 기미가 아닌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중력이었다. 현진은 여자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가졌던 호기심이 호의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중립 상태의 관심이라면 호의는 대상 쪽으로 기우는 다정함일 텐데, 현진은 여자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 대리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그녀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한 알 수 없는 감정의 온도가 그즈음의 현진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거, 누구 거예요?”
조수석 도어 홀에 안경이 비스듬히 놓여있었다. 알에 오렌지빛 그러데이션이 들어간 테 없는 안경을 꺼내 들며 현진이 석훈에게 물었다.
“어, 누구 거지? 잘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 봐요, 어제 누가 이 자리에 탔었는지.”
“누구지? 주인이 생각나면 찾으러 오겠지, 뭐.”
“당신은 매번 그런 식이야.”
“그런 식이라니?”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거.”
“무슨 소리야.”
“이렇게 티 나는 안경인데…….”
석훈은 현진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현진도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말문을 닫기 시작하면 아무리 애써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현진은 안경을 도어 홀에 다시 넣고 안전벨트를 맸다. 전날 누군가 앉았을 조수석의 각도와 간격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석훈은 그녀를 본사 입구에 내려주고 인사도 없이 강북으로 향했다.
퇴근 후 현진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석훈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대할 것이고, 석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너는 어떻게 그게 되냐고, 나는 그러는 네가 진저리가 난다고 할 테니까. 현진은 옷장 앞에 서서 실험복을 벗다가 그 여자의 옷장으로 가 싸움을 걸듯 문을 거칠게 열었다.
회사 근처 주택가에 있는 주민센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3층을 다 차지한 체력단련실에는 웬만한 운동기구들이 다 있는 듯했다. 러닝머신, 사이클, 다양한 무게의 덤벨, 그외 눈에는 익으나 이름은 알 수 없는 기구들이 많았다. 현진은 그곳에서 제공하는 감색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에어팟을 귀에 꽂고 실험하면서 들었던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했다. 샘 옥의 ‘사일런트’가 흘러나왔다. 플리이즈 텔 미 댓 아이 엠 오케이……. 아직 십일월 초순이었지만 현진은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명치 위 어딘가에서 계속 부유하여 떠도는 먼지 같은 것도 내려앉아 고요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창밖에는 어둠만이 내렸고 거울이 되어버린 창 위로 멍하게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 있었다. 러닝머신 위에 오른 지 삼십 분이 지났는데도 뛰지 않고 계속 걸었다. 3, 4, 5. 기계의 속도를 올렸다. 뛰기 시작하니 명치보다 심장이 강하게 느껴졌다. 음악은 낮고 느리게 흐르는데 기계 위에 선 다리와 심장은 빠르게 뛰며 서로 어긋났다. 음악을 끄고 속도와 가쁜 숨소리에 집중했다. 그 여자가 말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운동에 집중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현진은 한 시간을 뛰기만 했다. 기본값이 마이너스인 삶에서는 집중으로 얻을 수 있는 무념의 값, 즉 근사치 0이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고 현진은 생각했다. 샤워하기 위해 라커룸에 갔을 때 거짓말처럼 그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현진도 여자도 서로를 알아보고 멈칫했다. 그러다 여자가 일어서서 미소를 짓고 오른손을 바지에 문지른 후 현진에게 내밀었다.
“운동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잖아요.”
현진이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말했다. 현진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일이 곧 끝난다기에 일 층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잠깐 커피나 마시자고.
두 사람은 로비 자판기에서 설탕 없는 밀크커피를 뽑아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닫혀있는 창문 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현진은 컵만 만지작거리며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운 빛은 바래있었다. 먼저 보자고 했지만, 막상 여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잘 지내냐고 묻는 것도 왜 일을 그만두었냐고 묻는 것도 권 대리의 죽음을 안중에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들리기를 바라며 묻고 싶기도 했다. 그녀가 먼저 무슨 말이든 꺼내길 기다렸다. 다행히 여자가 입을 열었다.
“눈이 왔으면 좋겠어요.”
다음 날 조수석 도어 홀에는 안경이 없었다. 현진은 불쾌했다. 그러나 안경이 그대로 있어도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예상대로 석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전날 현진이 늦게 귀가했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롤 게임만 했다. 차 안은 침대 위 빼고는 석훈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공간이었지만 때때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침묵은 며칠간 이어질 것이었다. 현진은 예전처럼 무거운 공기를 깨기 위해 애써 가벼운 척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퇴근 후 주민센터로 가서 기계 위에서 뛰었다. 음악을 들으며 잠시 걷다가 속도를 올리고 음악 없이 한 시간을 뛰었다. 샤워를 했고 일이 끝난 그 여자를 만나 로비에서 달지 않은 밀크커피를 마셨다. 첫날은 현진이 운동하면서 듣고 있던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가끔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 날은 여자가 커피가 아직 남아있는 종이컵을 구기며 말했다.
“권 대리님 부인이 어떻게 알고 여기로 저를 찾아왔었어요. 장례 후 일주일 뒤였나. 제 뺨을 한 대 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제 말이 듣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고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렇지, 당연하긴 하지. 현진은 잠시 말을 고르며 생각했다. 어쩌면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말랑한 상황 속에서 일탈을 꿈꾸기 시작하는 걸까. 죽어버린 권 대리는 차치하더라도 이 여자가 잘못한 것은 정말 무엇일까. 친절한 한 남자의 호의를 뿌리치지 않은 것? 사람들 말대로 그가 품은 특별한 감정을 이용한 것? 혹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한 것?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권 대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리라고는 여자도, 권 대리 자신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진은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물었다.
“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어요?”
“가만히 있어야 빨리 잊히잖아요. 해명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요.”
그러면서 남편이 열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거울이 된 유리창 앞으로 가 읊조리듯 덧붙였다.
“떨어지라고, 떨어지라고 마구 흔들어대는데 버틸 재간이 없어요.”
현진은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을 뿐이었다.
며칠 뒤 여자의 남편이 경찰에게 잡혔다. 권 대리가 쓰러졌던 날 새벽 그는 집에서 자고 있었다고 참고인 조사에서 진술했지만, 경찰은 그가 그날 새벽 한 시경 벤치에 앉아 술을 먹고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뒤늦게 확보했다. 사고 현장에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파트 놀이터 CCTV에 찍힌 것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걷다가 자신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권 대리를 돌로 내리쳤다고 자백했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연석 말고도 화단에 크고 작은 돌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여자의 남편은 권 대리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여자는 주민센터에서도 사라졌다. 동네에서도 사라졌을 것이라고 현진은 생각했다. 사라지는 것으로, 계속해서 사라지는 것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라졌을 거라고. 여직원 휴게실은 또다시 그 여자 이야기로 들떴다. 그녀가 빌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남편을 시켜서 권 대리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자기가 사는 동네 주민센터 체력단련실에서 여자가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는 직원도 있었다. 현진은 옷장 문을 열고 거울 앞에 섰다. 립글로스를 천천히 덧칠하며 여자의 남편이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했다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되뇌었다.
“정말 순간적이었어요, 모든 것이.”
회사는 청소 용역 업체를 바꾸면서 오십 대 이상만 고용하도록 했다. 마치 젊다는 것이 범죄의 빌미라도 되는 것처럼. 권 대리의 사건이 모든 사업소에 퍼졌을 텐데도 석훈은 아무것도 현진에게 물어오지 않았다. 가끔 그의 시선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현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었다.
석훈의 침묵이 지속되던 어느날 늦은 오후, 현진은 간절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업무실적 보고 준비로 어수선한 사무실을 피해 실험동을 향했다. 선임연구원이 된 이후로 수년 동안 찾지 않은 곳이었다. 통합환경분석센터가 큰 규모로 들어서면서 실험동은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다. 일 층에 있는 분석실은 초저녁처럼 어둑했다. 서너 개의 환기팬이 벽에 붙어 낡은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시약들의 냄새로 매캐했다. 아무거나 생성되고 무엇이든 소멸될 것 같았다. 석훈을 처음 만났던 분석실과 비슷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현진은 시약장에서 염산 시약병을 꺼내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의 모든 수질 분석에는 산이 쓰인다. 산, ‘acid’라는 말의 어원은 아랍의 한 연금술사가 금속을 녹이는 액체들을 ‘acqua acuta’, 즉 ‘날카로운 물’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석훈이 증류수 같은 표정으로 말해주었었다. 현진은 자신의 왼손등을 바라보았다. 염산으로 베였던 붉은 상처는 사라졌다. 팔 년이라는 시간은 그 자리를 흔적 없이 희석하기에 충분한 양의 용매였다.
현진은 흰 니트릴 장갑을 양손에 끼고 삼각플라스크에 염산을 서너 방울 떨어뜨린 후, 증류수로 백 밀리미터 눈금까지 채워서 흔들었다. 그렇게 농도를 알 수 없는 묽은 염산 용액에 붉은 지시약을 두어 방울 넣고, 농도를 알고 있는 수산화나트륨 용액을 뷰렛에 넣었다. 뷰렛의 코크를 살짝 열어 용액을 염산 용액에 조금씩 떨어뜨려 흔들면 분홍색이 생겼다 사라진다. 그러다 투명했던 시료 전체가 분홍색으로 물들고 더 이상 투명해지지 않는 정확한 부피에 다다른다. 반응하는 두 물질의 양이 같아지는 종말점, 더 이상 갈증이 없는 중화 지점이다. 현진은 이 정확하고 공평한 물질의 세계를 사랑했다. 종말점을 향해 갈 때 심장은 속도를 냈고 입술은 부풀어 올랐다. 어지러웠다. 그러나 종말점을 지나 더 이상 무색투명해지지 않는 분홍색 용액을 보면 허탈했다. 벌거벗은 그녀에게 몇 방울로 떨어지다 절정에 다다른 후 말없이 돌아서는, 석훈의 뒷모습으로 끝나는 그들의 밤 같았다. 석훈은 실험할 때마다 끼는 니트릴 장갑처럼 절정에 다다르기 전 어김없이 콘돔을 꼈다. 그 하찮은 막이 온 밤을 서럽게 했다. 현진은 그러한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용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분홍색의 용액을 개수대에 버리며 현진은 쓸쓸하게 웃었다.
런던의 겨울은 서울보다 온화했다. 학회 일정을 마친 현진의 일행은 외투를 가볍게 걸치고 리버풀 스트리트로 향했다. 런던에서 뷰가 가장 좋다는 '더 샤드'의 레스토랑은 예약이 다 찼다고 해서 차선으로 '타워 42'를 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건물의 가장 높은 층, 사십이 층에 내렸다. 어둑한 입구에 ‘Vertigo 42’라는 글자가 나트륨등의 간접 조명을 받으며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룹 지어 창가에 앉았다. 현진이 속한 무리는 샴페인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갓 구워나온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을 보며 현진은 석훈을 생각했다. 그는 스콘을 먹을 때면 잼이 아닌 클로티드 크림만을 고집했다.
“나, 다음 주에 런던에서 학회 있어요.”
토요일 아침부터 롤 게임에 빠져있는 석훈의 뒤통수에 대고 현진은 말했었다.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석훈은 대답이 없었다. 헤드폰도 끼고 있지 않았다. 집중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하얗게 은폐하고 있는 저 눈처럼. 현진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면서 날씨가 섣불리 따뜻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질퍽대는 잿빛의 눈 슬러시보다 서서히 승화되는 얼어붙은 눈길을 조심히 걷는 것이 나았다.
창밖으로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저 멀리 한국의 월드타워를 닮은 건물이 '더 샤드'라고 했다. 거대한 A자 형태로 솟아있는 건물 외벽 유리에 지평선을 따라 번져있는 일몰의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현진은 두 남자와 같이 앉게 되었는데 둘 다 학회에서 처음 본 얼굴들이었다. 현진과 비슷한 나이대 같아 보였다. 기기분석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어서 아는 이들의 이름을 대니 대화거리가 생겼다. 밖은 어느덧 해가 가라앉아 건물과 차량이 빛을 대신했다. 현진은 낯을 가리는 편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겁기까지 했다. 말을 많이 했는지 시장기가 느껴져 스콘 조각에 딸기잼을 바르고 그 위로 클로티드 크림을 발라 입에 넣었다. 두 남자 중 한 명이 그런 현진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아내는 크림만 발라 먹던데……. 참, 다니시는 연구소가 어디라고 하셨죠?”
현진은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털어내며 회사 이름을 댔다. 남자는 대답을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색했다. 혹시 L을 아느냐고 물었다. 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다고 했다. 남자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L의 남편이라고 했다. L이 다음 달부터 그 연구소로 옮겨 강북 사업소 수질센터 팀장을 맡게 되었다고, 잘 부탁한다며 아직 술이 남아있는 현진의 잔에 샴페인을 채워주었다. 다른 한 남자는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어진 현진을 한참 전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현진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웠다. 귀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현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짙어져 더욱 반짝거리는 이국의 거리가 아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