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어둠을 가르고 켜진 불빛,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상자들. 우리들의 소식을 연결해주는 집배원은 매일같이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의 소식’을 싣고 달린다. 그들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것은 단순한 봉투와 택배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다림과 일상, 그리고 삶의 온기다. 교통사고의 위험과 끝없는 물량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오늘도 누군가 그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배원의 발걸음은 도시와 마을을 잇는 작은 다리이자, 이웃의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심장박동이다.
원주우체국 이범준(51) 무흥팀장의 일과를 함께 하며, 길 위의 메신저로 살아가는 집배원의 하루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봤다. 무흥팀은 무실동 흥업면 귀래면 판부면 서곡리를 담당하는 팀이다.
■적막을 깨우는 새벽, 집배원의 첫걸음=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30분. 원주우체국 우편물류과 집배실의 불이 켜져 있다. 적막을 깨고 물류 트럭에서 쏟아져 나온 상자들이 쉼 없이 옮겨지는 소리만이 공기를 가른다. 집배센터 안으로 들어서자 종이와 잉크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친다. 집배원들은 장갑을 낀 채 무심하지만 능숙한 손놀림으로 구역별 우편을 분류하고 있었다. 이범준 팀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2021년도 12월 입사한 이 팀장은 “누나가 원주에 몇 안 되는 여성 집배원이었어요. 본래 경호업체에서 일하다 퇴사한 뒤 누나의 제안으로 집배원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쉴 새 없이 배달시스템(PDA) 단말기로 우편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틈틈이 동료들과 안부를 나누거나, 배달 요령을 서로 공유한다.
“처음에는 두 달간 분류 작업도 느려서 거의 사무실에서 먹고 잤죠.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방심은 금물입니다”

■안전 제일, 신속 정확=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오전 8시가 되면 ‘안전에 유의하라’는 방송이 사무실 전체를 울린다. 오늘 방송은 최근 비보호 좌회전 중 발생한 교통사고와 뱀 물림 사고 사례를 다뤘다.
“급하다 보니 교통사고도 자주 나고, 배송 중 벌에 쏘인 적도 있습니다. 벌에 내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 번 정도 쏘이니 앞이 흐릿해지더군요. 그래도 멈출 수 없었어요. 내가 멈추면 동료들에게 부담이 되니까요. 결국 업무를 마치고 거의 실려가다시피 병원에 갔죠”.
그 와중에도 실수는 없어야 한다. “주소 한 글자, 숫자 하나가 틀리면 큰일 납니다. 다른 곳에 배송하면 다시 돌아와야 하고, 결국 다른 배송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최근에는 아파트마다 지상 출입을 막으면서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공무수행 중 미로 같은 지하주차장을 헤매다 보면, 기다리는 건 고객들의 몫이다.

■출근은 곧 전쟁=공식 출근 시간은 오전 8시지만, 실제로는 한 시간 반 일찍 출근한다. 오전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편과 등기, 택배 분류 작업을 마치면 오토바이 배달 상자는 오전 물량으로 가득 찬다. 분류가 끝나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오전 9시, 차고지에 걸린 ‘여러분의 무사 귀국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현수막 아래, 집배원들은 각자의 오토바이를 타고 하나둘씩 출발한다. 이 팀장도 우편과 택배를 가득 싣고 담당 구역으로 향한다.
그의 구역은 주로 흥업면 사제리 일대다. 하루 평균 약 800개의 우편과 택배를 처리한다. 이 팀장은 “가볍게 보이는 박스도 하루 종일 들다 보면 몸이 축납니다. 물류가 많으면 오토바이가 넘어지거나, 이를 지탱하는 스탠드가 부러지거나 일도 있어요. 그럴 땐 행인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물건을 잠시 내려 다시 세워야 하죠”라고 노하우를 전했다.
목토시 착용도 필수다. 추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도로를 달릴 때 앞차 타이어에 튀는 돌이나 먼지, 벌레 등이 얼굴을 스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일상과 맞닿다=첫 배송지는 무실주공아파트 8단지. 담당 구역은 아니지만 결혼을 앞둔 동료의 조기 퇴근을 돕기 위해 물량을 분담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세요. 요즘은 날씨가 쌀쌀하네요”. 이 팀장을 본 주민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집배원과 주민 사이의 짧은 대화는 아침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한다.
이 팀장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건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생필품, 어떤 때는 아이들 교재, 또 어떤 때는 가족의 정성이 담긴 소포죠. 저는 그걸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정의했다.
이날 아파트는 평일 오전이라 대부분 집이 비어 있었다. 이 팀장은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 인기척을 확인한 뒤 문 앞에 택배를 놓거나, 우편함에 신중히 우편물을 넣었다.
■현실의 벽=오전 10시, 이 팀장의 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아까워 박스와 우편물을 들고 곧바로 계단을 오르던 이 팀장은 “시내권 아파트를 담당하면 살 찔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된다는 농담도 합니다”라모 미소지었다.
점심시간은 따로 없다. 아침에 챙겨 온 삼각김밥조차 먹을 시간이 없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깝죠. 하루 물량을 다 소화하려면 계속 달려야 하니까요”.
어려움도 많다. 아슬아슬하게 차량 사이를 지나 배송한 우편을 받자마자 눈 앞에서 찢거나, 무시하는 고객을 보면 허탈하다. 배달이 늦으면 민원이 들어올 수 있어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
이 팀장은 “물론 배송이 잘못되면 다시 가져다드리지만, 고객이 주소 이전을 하지 않아 이사 전 주소로 가는 경우도 많아요.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면 우체국에 주소 이전 신고를 꼭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길 위의 작은 보람=이 팀장이 다시 힘을 내는 순간도 있다. 최근 자주 방문하던 한 집 앞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이 서성이는 걸 보고 고객에게 즉시 알렸다. 며칠 후 그 고객이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치안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배송지 주민들이 간식을 건네는 일도 많다. 어떤 집은 자양강장제를, 또 어떤 집은 커피를 내어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에 대한 질문에 이 팀장은 "한 대학생이 있었어요. 찾아갈 때마다 음료나 견과류를 챙겨주어 아직도 기억하죠. 또 약을 배송하는 고객이 있었는데, 약이 햇빛에 약하다고 해서 매번 신경 써서 그늘을 찾아 놓았어요. 어느 날 그분이 손편지를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하더군요.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 마다 정말 큰 힘이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돌아오는 길=오후 4시가 넘으면 하루 배송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사무실로 복귀한 뒤에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들어온 우편을 미리 분류해야 다음 날 업무가 수월해져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시간은 없다.
피로에 젖은 얼굴로 잠시 의자에 기대 숨을 고른다.
“하루가 끝나면 다리가 퉁퉁 붓고, 손목이 욱신거리는 건 기본이에요. 그래도 내일은 또 출근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의 담담한 말에는 묘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이 팀장과 같은 집배원들은 매일 도시와 농촌, 산골마을을 잇는다. 교통사고 위험, 인력 부족, 산업재해 속에서도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연결자’이자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사실 길 위에서 살아갑니다. 그 길은 곧 사람들의 일상이고, 저는 그 길을 잇는 다리라는 게 뿌듯합니다”. 이 팀장이 정의한 집배원의 삶에 숙연해 지는 순간이었다.
■길 위에서 이어지는 공동체=집배원의 하루는 단순한 노동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골목골목을 흐르는 공동체의 맥박이다. 디지털 시대라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발로 뛰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이범준 팀장의 손에 쥔 우편과 택배는 기다림이자, 사회적 신뢰다. 그의 발걸음은 오늘도 대한민국을 살아 있게 하는 작은 심장박동이다. 길 위의 사람들, 그들의 하루가 쌓여 우리의 내일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