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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왕실의 간절함 간직한 천년고찰 수타사 … 보물 4점에 담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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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제6경인 공작산 수타사 문화재 다수
조선시대 건축양식 엿볼 수 있는 대적광전
소조 사천왕상과 뱃속에서 나온 ‘월인석보’
조선 왕실과 밀접한 연관 있던 역사 간직

◇공작산 자락에 있는 수타사. 사진=홍천군청

공작이 날개를 펼친 듯한 능선을 품은 홍천군 영귀미면 덕치리의 공작산에는 천년고찰 수타사(壽陀寺)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인 수타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선 왕실을 비롯한 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국가 지정 문화유산 보물만 4점이 있다.

홍천 9경 중 제6경인 수타사를 단풍철에 찾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천년고찰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수타사 홍우당 부도 사진=신하림기자

■水墮寺가 壽陀寺로 바뀐 이유=수타사의 입구 교각 아래에는 지금도 큰 냇물인 덕지천이 흐른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홍천 지역 주민들은 배를 타고 건넜다. 절 옆에 흐르는 맑고 큰 물은 수타사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수타사는 관련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日月寺)가 1569년(선조 2)에 현 위치인 공작산으로 옮겨 지어져 수타사(水墮寺)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전소됐으나 1636년 공잠대사(工岑大師)가 고쳐 지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수타사(水墮寺)란 이름은 물이 두들기는 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매년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절 뒤에 있던 깊은 소(沼)에 승려가 한 명씩 빠져 죽는 것이었다. 이후 1811년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뜻하는 목숨 수(壽)에 아미타불에 쓰이는 타(陀)를 붙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다.

◇일제 수탈의 흔적이 남은 수타사 입구 소나무들. 사진=신하림기자

■승려 부도탑과 일제시대 상처 남은 소나무=수타사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는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안고 있다. 소나무 가지가 뻗어 나가는 큰 줄기마다 V자 모양으로 깊게 파인 상처를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이 송탄유(松炭油)를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채취했던 일제 수탈의 흔적이다.

소나무 숲에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홍우당 부도’이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묘탑(墓塔) 형태의 조형물로 승려 무덤이라 하여 승탑(僧塔)이라고도 한다. 수타사 입구에는 7기의 부도가 서 있다. 홍우당 부도는 바닥돌 위로 3단으로 이뤄진 기단을 두고,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대부분이 6각을 이루고 있다.

동언우 홍천문화원 연구위원은 “명망 있는 승려들의 부도가 많은 것은 수타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수타사 봉황문의 사천왕상 중 동방지국천왕. 뱃속에서 월인석보가 발견됐다. 사진=신하림기자

■소조 사천왕상, 그 안에서 나온 월인석보=속세를 떠나 부처님께로 가기 전에 지나는 봉황문에는 좌우로 4구의 사천왕상이 있다. 수타사 보유한 첫 번째 보물급 문화유산이다. 분노하는 듯한 얼굴, 갑옷을 입고 각각 긴 칼, 깃대, 용과 여의주, 비파 등을 지닌 3.2m 높이의 사천왕상은 악귀를 힘껏 밟고 있다. 절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현종15년(1674)에 법륜이 봉황문을 세우고, 2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여담이 사천왕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1957년 사천왕상 해체 수리 과정에서 칼을 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의 뱃속에서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발견됐다. 바로 세조가 지은 ‘월인석보 17~18권’이다. 지금은 수타사 성보박물관인 보장각에 보관돼 있다. 월인석보는 왕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록이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평소 어머니 소헌 왕후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했는데,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석보상절’을 지었다. 아버지 세종은 깊은 감명을 받아 석보상절에 대한 찬가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후 세조 3년, 사랑하는 장남 의경세자를 잃은 세조는 아들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한 ‘월인석보’를 지었다. 월인석보는 왕이 직접 편찬한 최초이자 최후의 불교 서적으로 1983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급 문화유산인 수타사 동종. 사진=신하림기자

■사찰 안의 누각 흥회루… 장인이 만든 동종=봉황문을 지나 보이는 흥회루는 사찰 안의 강당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누각이 있는 사찰은 전국적으로 70곳 정도일 정도로 드문데 수타사 흥회루는 이 중 6번째로 지어졌다. 흥회루는 강원 지역 내 사찰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누강당 형식의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이다. 대개 사찰의 누각은 기둥재를 자연 상태의 원목을 껍질만 벗겨내고 거칠게 마감하는데 흥휘루는 치밀하게 가공한 원형 기둥을 갖고 있다. 흥회루는 조선 후기 건축물의 양식적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흥회루 옆에는 보물급 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 경상도에서 활동한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인 사인비구가 만든 조선시대 종이다. 수타사 동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작품 8구 가운데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변에 넣은 꽃 모양의 무늬가 유난히 아름답다. 지금은 타종을 하지 않지만, 종이 울리던 시절에는 읍내까지 들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수타사 대적광전. 사진=신하림기자

■대적광전, 두 장의 청기와=흥회루를 지나면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봉안한 법당 건축물인 대적광전이 나온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지붕이 시원하게 퍼지는 힘찬 모양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은 겹처마가 있는 다포계 팔작 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화재청은 지난 2023년 대적광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대적광전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 건축물 부재 사이의 비례가 잘 잡혀 예술성이 높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 불전 건물”이라며 “불단과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평면 형식과 일부 공포 등에서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1636년(인조 14) 중건 이후 중수·개수에 대한 명확한 사료가 뒷받침돼 건축적·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대적광전의 지붕 가운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장의 청기와가 보인다.

청기와는 특수한 유약을 사용해 구워야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왕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수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된 월인석보. 사진=신하림기자

■정희왕후의 태가 묻힌 공작산과 수타사=대적광전의 청기와는 수타사가 조선 왕실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찰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수타사는 세조의 부인인 정희 왕후와 인연이 깊다. 그녀의 태실이 묻인 태봉(胎封)이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태실은 홍천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 윤번이 11살 딸이 왕실과 사돈을 맺게 되자 소중하게 보관하던 태를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공작산 자락에 둔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토대로 수타사는 태실 수호를 위해 원당 사찰로 지정됐고, 그 이유로 왕실이 청기와를 내렸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이 밖에도 수타사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인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유물(176호), 괘불(177호), 삼층석탑(11호), 영산회상도(122호), 지장시왕도(123호) 등이 있다.

수타사는 입장료, 주차료를 받지 않는 사찰이기도 하다. 연간 방문객은 50만명 정도이며, 해마다 늘고 있다. 수타사와 홍천군은 주차장 확장 방안을 찾고 있다. 수타사는 템플 스테이도 구상 중이다.

민병하 수타사 신도회장은 “천년고찰의 문화 및 역사적 가치가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며 “오래 머물고 싶은 강원 영서권 대표 사찰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수타사 지장시왕도. 사진=신하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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