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폭군과 개혁군주로 평가가 엇갈리는 광해군을 사실·허구가 버무려진 전제와 설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러한 얼개를 가능케 한 것은 실록을 비롯한 역사서에 남겨진 그의 행적 때문이다. 광해군은 12년의 재위기간을 폭정으로 일관한 연산군과 달리,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임진왜란을 수습한 것은 물론 , 전란 후에는 대동법 실시와 실리외교를 통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하는 등 유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이 광해군의 업적으로 역사 속에 분명 존재하는데도 그가 폭군으로 분류된 것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승자들, 즉 반정세력들의 의지가 투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질고 덕이 뛰어난 폭군’이라는 이율배반적 인물이 탄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두명의 광해군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이다.

영화에서 광대 하선이 광해군의 대타로 용상(龍牀)에 올라 처음 연습하고 지시한 것은 대동법에 관한 것이었다. 폐지된 대동법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 것. 쓰여진 글귀만 앵무새처럼 외우던 하선은 대동법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해 점차 자각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방납제도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궁녀 사월이 가족의 이야기 듣고는 결심을 굳힌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실시한 것은 그의 즉위년인 1608년 부터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중략)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선혜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중략)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광해군일기[정초본]4권, 광해 즉위년 5월 7일 )”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대동법(초기에는 선혜법이라고 불렀다)을 실시하게 된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징수하던 공납 대신, 토지 소유량에 따라 쌀, 베, 돈 등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이 제도는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납제도는 관리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물로 부과하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의 문제도 발생해 백성들은 이를 구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전략)심지어는 각사의 공물(貢物)까지도 각각 그 사람들과 내통하여 방납(防納)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가격을 갑절로 받아들여 한 푼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집터를 빼앗아 크게 저택을 지은 것이 세 군데나 되었으며, 뇌물이 밀려들어 문앞은 저자를 이루었습니다.(광해군일기[중초본]3권, 광해 즉위년 4월 19일)”
이러한 상황에서 방납은 더욱 성행하게 됐고, 폭리를 취해 부를 쌓는 방납인들에 대한 문제제기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광해군 일기에는 기전(畿甸·경기도 일대)에서 공납의 폐단이 특히 심하다며 경기도에서 이를 먼저 시행하게 되지만 대동법의 전국 확대 실시가 논의된 것은 그로부터 6년이나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