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정회철의 ‘우리 술 이야기’]명주·토속주 뿌리내린 조선…더욱 고급스러워지다

우리 술의 역사 (2)

◇김홍도의 주막(국립중앙박물관)

3. 조선시대 - 전통주의 전성기

조선시대의 술의 특징은 ‘고급화’라고 할 수 있다. 제조원료도 멥쌀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기술도 단양주법(한번 빚는 술)에서 중양주법(2번 이상 빚는 술)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는 삼해주, 이화주, 하향주 등 현재까지 명주로 꼽히는 술이 정착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교사회였던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대량으로 술을 제조하였다면,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중시하여 집안의 제례나 손님접대 등에 사용하기 위해 여성들이 소규모로 술을 제조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양주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각 지방마다 토속주가 뿌리를 내리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서울경기의 ‘삼해주와 약산춘’, 충청지방의 ‘소곡주, 노산춘’, 호남지방의 ‘호산춘과 두견주’, 영남지방의 ‘과하주, 송엽주, 청명주’, 평안도 지방의 ‘벽향주’ 등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옹기로 된 증류전용의 ‘소줏고리’가 등장하면서 증류주의 유행을 가져왔다. 세종 때에 소주를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기 시작하여 성종때에는 모든 연회에 소주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소주를 마시는 것은 양반계급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주’란 주정을 물로 희석한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탁주나 약주를 증류한 ‘증류식 소주’를 말한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의 3대 명주로 감홍로, 이강고, 죽력고를 꼽았다. 육당이 말한 ‘명주’란 무슨 품평회를 통해 인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술을 의미한다. 이들 3대 명주는 모두 증류주로서, 당시 막걸리와 약주는 변질우려가 있어서 다른 지역으로 유통되기 어려웠지만, 증류식 소주는 전국 유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소주는 이로 인한 폐해도 많아 금주령이 빈번하게 내려질 정도였다. 술, 특히 소주는 곡물의 낭비가 심해 곡물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 금주령이 내려졌으며, 흉년이 드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다. 그러나 금주령에도 몸에 약이 되는 ‘약주’만은 예외로 두어, 양반이 먹는 술은 죄다 약주가 되었으며, 결국 금주령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고 한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금주령을 실시한 왕은 영조였다. 원래 금주령은 몇 달 정도의 한시적인 것이었는데, 영조 때에는 무려 10년 넘게 계속 금주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금주령을 어긴 사람에게 처음에는 감옥에 가두거나 벌금을 물리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사형시키기도 하였다. 이때 가장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병마사 윤구연이다. 윤구연이 금주령을 어겼다는 고발이 들어와 증거물을 압수했지만, 그 증거물이란 것이 빈 술통뿐이었다. 영조는 여러 신하들의 구명 상소에도 불구하고 윤구연을 참형에 처하였다.

술은 금한다고 해서 금해지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밀주가 성행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이로 인한 폐해가 많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금란방(禁亂房)은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데, 벌금을 지나치게 거두어들여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러한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술의 제조법은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종류도 다양하고 고급화되었다. 또한 한양 자체가 술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술집도 번성했다. 한양성 전체 인구의 10~20퍼센트가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다는 정조 때의 기록도 있고, 한양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술집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시대 양조장

4. 전통주의 암흑기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통치자금를 확보하기 수단으로 주세법을 시행하여 술에 세금을 매겼다. 역사이래 최초로 술이 과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주세를 걷어들이기 위해 자가양조를 금지함으로써 우리의 전통 가양주 문화가 말살되고, 대규모로 술을 제조하는 양조장이 생겨났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 주세법을 발포하여 면허제를 도입하였다. 자가양조를 허용하되 자가용, 판매용을 가리지 않고 면허제를 도입하되 제조석수(製造石數)를 제한하였다. 생산량의 하한이 정해져서 청주는 100석 이상, 탁주는 50석 이상을 제조해야 했다. 또한 주세율을 차츰 인상하여 자가양조의 세율이 영업용 양조보다 높았다.

이로 인해 면허를 받지 못하거나, 주세 내기가 어려운 자가양조 및 제조석수를 채우지 못하는 영세 주조업자는 차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가양조 면허자 역시 급감하여 1916년에 30여만명이었는데, 1931년에는 1명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자가양조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쇠퇴의 길로 들어서다가 급기야 일제는 1934년에 자가양조 제조면허제를 완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가양주는 밀주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밀주의 역사는 해방 후 1994년까지 이어졌다. 1994년에 정부는 조세범처벌법을 개정하여 면허없이도 자가양조를 가능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전통주를 생산했던 자가양조 및 소규모 제조장들은 일제에 의해 말살되고, 대신 대규모 양조장이 1920년대에 등장하게 된다.

이들 대규모 양조장들은 대자본의 일본인과 일부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들 양조장들은 한국 전통을 지키고 계승한다는 생각이나 신념이 없는지라 차츰 우리의 전통 ‘누룩’ 대신 일본식 당화제인 ‘입국’을 사용하여 막걸리를 제조하였다. ‘누룩’을 통한 대량 양조기술을 발달시키기 보다는 일본의 배양기술을 그대로 가져와 술을 빚게 된 것이다. 이 술이 바로 지금의 ‘입국 막걸리’인 것이다.

또한 일제는 누룩의 자가 제조가 밀주의 원료로 제공될 수 있다고 보고, 농촌에서 누룩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심지어 규모가 큰 양조장에서 자체 소비용으로 누룩을 만드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있는 누룩제조장을 통합함으로써 대규모 누룩제조장이 등장하였다.

해방 후에도 일제치하의 주세행정이 그대로 이어져, 유명 전통주와 지방 향토주들의 설자리가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전통주는 더 피폐해졌고,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수입 밀가루의 소비를 위해 식량난과 쌀소비억제라는 명분을 걸어 막걸리 제조에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1962년 주세법시행령을 개정하여 쌀 사용량을 70% 이하로 줄이고, 1972년 ‘양곡관리법’을 통해 쌀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 양곡관리법을 개정하여 증류식 소주에 곡류사용을 금지하였다. 증류식 소주는 그 원주를 ‘곡류’로 빚어 이를 증류한 술인데, 곡류사용을 금지했으니, 증류식 소주를 생산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증류식 소주 대신에 주정을 물로 희석한 희석식 소주가 확산되었다. 이에 부유층은 맥주와 양주를 소비하고, 서민들은 시큼한 밀가루 막걸리와 쓰디 쓴 희석식 소주를 소비하는 음주문화의 양극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태평성시도-조선시대 주루(국립중앙박물관)

5. 전통주의 재건기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내놓을 우리의 전통술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잊혀진 전통주 50여가지가 재현되었다. 그리고 전통주에 관한 각종 규제가 완화되었다.

1991년에 탁주에 최초로 아스파탐 등의 첨가물료가 허용되었다. 1994년에 약주 공급구역 제한제도가 폐지되었고, 2001년에 탁주 공급구역 제한제도도 폐지되었다. 2010년 ‘전통주 등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주세 감경 등과 같은 전통주 진흥을 위한 각종 지원책들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한때 일본에서 막걸리 붐이 일어나 국내에서도 막걸리 소비가 늘어나기도 하였다.

작금에 와서 전체 술 소비는 감소추세에 있지만, 전통주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전통주가 전체 주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 0.71퍼센트에서 2021년에는 1.00퍼센트로 증가했다. 출고 금액으로 보면 2020년 626억원에서 2021년 941억원으로 315억으로 증가했다.

◇정회철 전통주조 예술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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