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법정칼럼]갱신의 시간

홍순건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 판사

입춘이 지나면서 진정한 청사(靑巳)의 해, 을사년이 도래하였다. 푸른 뱀의 해는 변화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해 1월 말 강원일보에 법관 인사이동을 앞두고 고된 깡치 사건의 갈무리에 관하여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때를 상기하자니 이번에는 새로운 도약을 뜻하는 푸른 뱀의 해의 의미와 함께 재판부의 새로운 시작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매년 2월말 전국 각지의 법관들은 친해진 동료와 낯익은 사무실을 떠나 다른 지역 법원으로 이동한다. 기존 근무지에서 근무를 하더라도 담당 사무가 변경됨에 따라 함께 근무할 동료와 사무실이 달라지기도 한다. 깡치 사건과 씨름을 하며 정초를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1~2년 같은 재판부에서 근무하며 손에 익을 정도로 어느 정도 파악된 사건들을 두고 하루아침에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인사이동 전까지 사건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하였다고 하여 인사이동 무렵 여유가 찾아온다거나 석별의 정을 오롯이 느낄 수 없다. 인사이동 이후 새롭게 담당할 사무는 새로 온 재판부에게 느긋함을 주지 않는다. 2~3주 안에 번갯불에 콩 볶는 것처럼 이사할 지역의 전셋집을 알아보거나 학령의 자녀가 있다면 입·전학 등 수속을 마쳐야 한다. 더욱이 인사이동과 함께 익숙하지 않은 사무분담에 배치될 경우 그 사무분담에 주로 관련되는 법령부터 업무 프로세스를 숙지할 시간이 부족함에도 인사이동 직후 그 주에 곧바로 재판에 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인사이동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면, 재판도 새로이 시작한다. 재판의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전임 재판부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건을 이어받은 새로운 재판부는 변론갱신 또는 공판갱신 절차를 거친다(소액 민사 사건이나 가처분 사건과 같은 일부 사건들은 제외되기는 한다). 재판의 갱신이란 새로운 재판부가 왔으니 소송법의 대원칙 중 하나인 ‘직접주의’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재판부가 다시 처음부터 재판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갱신 절차라고 하여 소장이나 공소장이 처음 접수된 것처럼 재판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아니고 소송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기존의 재판 절차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새로운 재판부가 당사자들 앞에서 확인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갱신 절차는 새로운 재판부가 사건 관계자들에게 새로운 재판부를 소개하는 기능도 있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갱신 절차는 ‘담당 재판부가 변경되었으므로 재판 절차를 갱신하겠습니다.’와 같은 재판장의 발언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완료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간단해 보여도 갱신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그 재판은 소송법을 위반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재판부가 갱신 절차를 간과하지 않고 반드시 거치기 마련이다. 한편 법정에서 보이는 갱신 절차와 달리 새로운 재판부는 법정에 가기 전에 이어받은 산적한 사건을 수일동안 처음부터 읽어보며 각각의 사건이 어떠한 방향으로 심리가 진행되면 바람직할지 검토한다. 사건의 수가 결코 적지 않기에 인사이동 직후인 2월말부터 3월까지는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고 쟁점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재판부가 인사이동으로 바쁜 가운데 갱신 절차를 거칠 사건을 만났다는 사정이 사건 파악을 충분히 하지 못 했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당사자들은 갱신 절차와 관계없이 전임 재판부의 재판이 그대로 이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리라고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2월말~3월초의 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매년 재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갱신 절차는 재판부의 마음가짐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 새로운 재판에 앞서 타성에 젖지 않도록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이 만나는 사건관계인들 앞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필자도 갱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 또한 4년간 강원도에서의 근무를 끝으로 인사이동을 앞두고 있다. 4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동안 강원도에서의 생활과 배움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면서 푸른 뱀의 해를 맞아 새로운 곳에서의 갱신될 재판에 앞서 마음도 갱신할 것을 다짐한다.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