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었으니까 예닐곱 살 무렵이었을 게다. 여름날 동네를 찾은 가설극장 관계자 형들을 따라 인근 마을로 다니며 영화 포스터 붙이는 것을 도와주고 받은 초대권으로 난생처음 영화를 보게 됐다. 50여년이 지나 제목은 물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던 컴컴한 천막 안에서 돌아가던 영사기 소리는 지금도 선명하다. 이후 이사 간 탄광촌에서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부식가게 인근에 있던 경찰서 지서(파출소) 관사의 가족들이 준 초대권으로 읍사무소 소재지임에도 꽤 규모가 컸던 극장을 들락거렸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1941~2023년) 선생은 자신의 장편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민족과 문학사 刊. 1993년 2월) 작가 후기에서 “나는 내 소설들이 영화로부터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창피하게 생각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의 성장 과정에서, 그리고 영어로 열심히 소설을 쓰던 대학 시절에도, 나는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이나 루돌프 플레시의 문장 작법 못지않게 영화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내 삶에 있었으므로 해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축복에 대해서, 할리우드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만들게 될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청춘 남녀들이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즐겨 찾는 곳 중의 하나가 극장이다. 지금은 소도시에도 대부분 있는 문화예술회관이 없던 시절에 지역의 대형 극장은 지역 주민들의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강릉의 신영극장은 당시에 대학 음악과 교수의 독창회, 방송국의 송년 음악회 등이 치러지는 곳이었다. 특히 ‘신영극장 앞’은 대표적인 약속장소였으며 지금도 주요 시내버스 노선들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강릉씨네마떼끄는 지난달 10일간의 연명기간을 통해 86개 단체, 3,574명의 개인 연명과 함께 ‘강릉시는 정동진독립영화제와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예산을 복원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1996년부터 지역의 영화문화 발전을 위해 활동해 온 비영리민간단체로, 1999년부터 정동진독립영화제를 개최하고, 2012년부터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을 운영하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강릉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가장 오래된 지역독립영화제와 강원 유일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라는, 강릉의 영화문화를 대표하는 중요 거점을 일궈냈다.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의 발전과 풍성한 영화문화를 꿈꿔 왔던 강릉씨네마떼끄의 자체적인 노력에 시민과 영화인의 호응, 지역의 영상·영화문화를 뒷받침하는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이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라고 지적했다. 또 지난해 8월 3일간 개최된 제26회 정동진독립영화제에는 1만4,500여명의 관객이 방문(2023년 8,100여명)했으며,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관객 수 역시 2023년 7,900여명에서 2024년 1만200여명으로 29% 증가했다고 밝혔다. 뚜렷하게 늘어난 관객을 통해 시민들의 영화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코로나 이후 회복세가 더딘 영화문화산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올해 강릉시는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예산은 7,000만원(지난해 1억2,000만원),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예산(지난해 6,000만원)은 전혀 편성하지 않았다. “재정 여건이 어렵다 보니 부득이하게 예산이 삭감되게 됐다”는 강릉시 관계자의 답변은 너무 궁색하다. 자칭 타칭 ‘예향’이란 자부심이 강한 강릉시민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