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서상의 단편소설 ‘용대리의 겨울’은 인제군 용대리를 배경으로 현대사회의 변화 속에서 전통과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는 한 마을과 그곳에 얽힌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임작가가 최근 펴낸 두번째 소설집 ‘국경을 넘은 남자’에 수록된 이 소설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돌아온 고향(용대리)에서 주인공이 겪게되는 갈등과 상처 그리고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 등을 그려낸다. 고향으로의 귀향과 갈등, 화해와 치유, 새로운 출발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서사 안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소설 말미에 굳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려 하지 않고 주인공 스스로 화해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현실적 여운을 담았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원양어선을 타고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으며 오랜 항해 생활을 해온 주인공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인 강원도 용대리로 돌아온다. 밤늦게 도착한 마을에서 길을 잃고 눈보라를 피하려 덕장 헛간에 들어선 그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황태 도둑으로 오해하는 사건에 휘말린다.
황태 덕장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삶을 이어온 마을은 개발로 급격히 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인공은 개발을 주도하는 이장과 마을 주민들로부터 할아버지가 물려준 덕장 부지가 공사 부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민들은 그에게 묘지를 이장하고 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가족의 묘지를 지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용대리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만나게 된다. 정선 출신으로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고향을 떠난 사연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서 주인공은 묘한 연대감 같은 것을 느낀다. 하지만 백련암의 스님을 통해 그 아가씨는 아버지가 과거 다방 여주인과 동거하며 낳은 딸, 홍련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다방 아가씨가 다름아닌 주인공의 이복동생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워 하던 주인공은 마을을 떠나기 전 땅을 팔아 얻은 돈 전부를 동생에게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끝내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밝히지는 않는다. 그 만의 방식으로 어긋난 가족사에 대한 사죄를 한 것이다.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눈이 내리는 속초항으로 향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과 고향에서의 갈등을 통해 과거와 화해하고,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준비한다.
이 작품에서 장소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상처, 그리고 고향이 겪는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먼저 인제 용대리는 주인공에게 가족과 추억이 깃든 고향이지만, 개발과 변화로 인해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해 있다. 과거 명태 덕장으로 번성했던 마을은 이제 관광 개발과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며 전통적 공동체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주인공이 느끼는 상실감을 극대화한다. 덕장은 가족의 삶과 깊이 연관된 장소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곳이다. 그러나 덕장은 더 이상 생계의 중심이 아니며 쇠락해 가고 있다. 주인공에게는 과거의 기억과 유산을 상징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개발과 이권을 둘러싼 갈등의 공간이 된다. 한편 백련암은 주인공이 위안을 얻고 삶의 전환점을 맞는 장소다.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묘지 문제에 대한 결단을 내린다. 이곳은 과거와 화해하고 내면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마을 다방은 인간 군상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장소다. 주인공은 다방에서 만난 아가씨와 교류하며 고향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문제들을 더욱 깊이 체감한다. 다방은 한편으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속초항은 주인공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는 고향의 갈등과 상처를 뒤로하고, 폭설 속에서 먼 바다를 향해 떠난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각 장소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연결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