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계엄 선포 후 이제까지 66일간 내란 정국으로 나라가 소용돌이쳤다. 계엄 전에도 시끄러웠지만 앞으로 을사년 1년 내내 쉽게 혼란의 지진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는 법이 놓여 있다. 양 진영은 내로라하는 율사(律士)들로 채워져 있다. 오히려 이것이 화근인 것 같다. 법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거나 법의 허술한 구멍을 파고들어 악용해 공격하는 ‘법꾸라지’ 때문이다. 법꾸라지는 법을 교묘하게 피하거나 악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단어다.
국가가 다분화되기 전인 고조선 때에는 8조금법(八條禁法)만으로도 사회가 안정됐다. 규정이 없어 다투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해 법을 정한다면 이 기록된 책들을 두기에 이 세상도 부족할 것이다.
법(法)이 무엇인가. 法은 삼수변 ‘?’과 갈거 ‘去’로 이루어졌다. 즉, 물이 높은 위에서 낮은 아래로 흘러가듯 순리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법이라고 한다. 사슴 가죽에 왈(曰)자를 써놓고 잡아당기는 방향에 따라 왈(曰)도 되고, 일(日)도 되는 것이다. 법 미꾸라지들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니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의 말이 맞는 것이다. 국민 다수의 마음에 흐르는 것이 순리(법) 아닌가?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국민의 마음이 정반대인 두 패로 갈라져 끝 모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법 이치는 하나이겠건만 방통위원장 탄핵이 4대4로 동수를 이루고 기각이 됐다. 법관에 따라 법 기준이 달라지니 법관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터에서 한창 일해야 할 많은 국민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일 목청을 높여 서로 정반대의 구호를 외쳐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국가의 신인도는 추락해 모든 경제 수치의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자 도자기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 도자기를 깨는 것은 일순간이다. 우리가 그간 피땀을 흘려 30-50(2019년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 세계 7위 안에 들어가는 클럽)을 넘어 G7의 문턱에 와 있었는데 허망하게 멀어져가고 있다. 경제 탑을 세운 것을 하루아침에 발로 차 무너뜨리는 꼴이 되고 있다.
정치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서로의 마음이 다르니 해석이 다르고 사사건건 부딪친다. 하이에나가 먹이를 놓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꼴이다. “너 죽고, 내 살기가 아니라, 나 죽더라도 너 죽이고, 애꿎은 국민 목조르기”가 돼 가고 있다. 지금은 솔로몬의 지혜를 동원해도, 트럼프 같은 충격요법을 써도 깨물었던 고기를 놓을 것 같지는 않다.
성숙된 국가는 위기가 닥칠 때 단합해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지만 수준이 낮은 국가는 위기에 좌초돼 주저앉고 만다고 한다. 우리 국민은 수준이 높아 전자일 것으로 생각한다.
부처님의 자비로 마음을 비우고 사랑의 묘약을 먹고 외치고 싶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떠오른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불신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덧붙여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서로 다름을 인정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