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정치적 극단화의 도전, 어떻게 넘어서나?

박준식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권력 의지에 모든 것을 거는 정치 지도자나 추종자들이 궁지에 몰리면 세상을 ‘아방’(我邦)과 ‘타방’(他邦)으로 쪼개는 극단화의 유혹에 빠진다. 세상이 ‘천사’와 ‘악마’의 대결 구도로 나뉘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상대편을 악으로 규정하고, 말을 뒤틀어 사실을 뒤집으며, 이에 호응하는 군중을 끌어들인다. 두 집단의 생사를 건 투쟁의 구도는 권력의 공포에 굴복하는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정치적 극단화를 원하는 권력 의지가 ‘대마왕’을 호출하는 각본은 단순 명쾌하고 효과적이다. 정치적 극단화가 독재자들의 확실한 전략인 이유이다.

그러나 정치적 극단화를 불러들이는 권력 의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대가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정치적 광기가 초래한 비극들로 가득차 있다. 권력 의지가 악마화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괴물이 탄생하고 이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군중인 경우가 허다하다. ‘홀로코스트’, ‘수용소군도’, ‘문화혁명’, ‘군사 쿠데타’, ‘양민 학살’과 같은 언어들은 20세기의 인류가 저지른 수많은 정치적 광기와 집단 참극의 기억을 전하기 위해 애쓴다.

전쟁, 쿠데타, 학살의 역정을 넘어 간신히 선진국에 올라선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정치적 악마화의 검은 안개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상처입고, 소외되고,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폭증은 극단화의 토양이다. 경제적 양극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 만들어진 적에 대한 공포는 극단화의 먹잇감이다. 극단적 정치 세력들을 양산하는 승자독식의 정치제도는 극단화의 통로이다. 법원 방화를 생중계하고, 정치적 혼란을 돈벌이 기회로 이용하는 소셜미디어의 범람은 전혀 새로운 위협이다. 정치적 악마화의 검은 안개가 걷히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정치적 극단화를 극복할 수 있는가? 인간의 문명은 극단화에 대항하는 지혜와 수단들을 알고 있고, 갖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고, 법의 지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많다. 극단과 이념의 망상을 거부하고, 이성으로 연결되고 소통으로 연대하는 시민들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정보와 지식 역량이 우리에게 있다. 정치적 광기의 모든 과정에 눈을 부릅 뜬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깨어 있는 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적 극단화의 망상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다수의 성숙한 시민들은 독재와 극단주의가 혐오하는 ‘질문하는 인간들’이다. 성숙한 시민들에게 권력자들의 말 비틀기와 선동의 검은 안개는 결코 먹히지 않는다. 이들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다. 정치적 광기의 발작이 허망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이다.

이 사회는 다시 일어날 힘이 있을까? 정치적 발작과 망상의 검은 안개를 걷어내는 빛을 찾는것은 결코 쉽지 않다. 증오의 뿌리는 너무 깊고, 상처는 너무 아프다. 대결과 증오의 세대가 다 사라져도 치유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는 우리가 주저앉지 않는 이유, 회복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광기의 발작을 극복하는 이성, 절제, 연대, 소통, 법치의 놀라운 힘을 축적해 왔다.

민주적 회복은 인내를 요구한다. 광기를 다스리는 소통과 협치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적 제도와 법치, 경제 구조의 불완전한 요소들을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은 우리가 힘을 합치면 능히 이룰 수 있다. 무엇보다 미래 세대가 지금의 정치 엘리트들보다 훨씬 높은 식견과 자원, 경험과 문화 자산을 갖고 있다는 것에 큰 희망을 걸어야 한다.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 대한민국은 성숙한 민주주의 선진국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뻗을 수 있다.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