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도)는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지역이다.
이곳에는 수백 곳의 사지(寺址·절터)가 분포하며 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쳐 이어진 불교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지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2025~2026 강원방문의 해’를 맞아 강원의 사지에 담긴 문화적·종교적·사회적 의미 등을 세 차례에 걸쳐 탐구한다.

‘한국사지총람(국가유산청 刊)’에 따르면 강원도에는 모두 378곳의 사지가 분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46곳의 사지가 원주에 자리를 잡고 있다. 원주는 남한강과 섬강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깊게 뿌리내린 지역이다. 이곳의 사지들은 단순한 과거의 유적이 아니라 강을 따라 형성된 불교문화의 흔적과 당시 사회, 경제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강과 불교가 결합한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어 현재까지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강과 불교문화의 만남:상징과 실리의 결과
원주에서 불교문화가 강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 때문만은 아니다. 강은 불교 철학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자원을 제공해 사찰과 불교문화가 번성하는 기반이 됐다. 불교에서 강은 정화와 깨달음의 상징으로, 흐르는 물은 번뇌를 씻어내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의 길을 나타낸다. 원주의 남한강과 섬강은 이러한 상징적 배경 속에서 사찰들이 수행과 명상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강은 사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실질적인 자원이기도 했다.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는 농업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물은 생활과 농업 활동의 기반이 됐다. 이러한 자원은 사찰이 지역사회와 연결되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특히 남한강과 섬강은 원주를 한반도 내륙의 주요 교통로와 연결시키며, 물자를 이동시키고 사람들의 교류를 촉진했다. 강을 따라 이동한 승려와 상인들은 사찰을 중심으로 교류하며, 불교 교리와 문화를 널리 퍼뜨렸다. 이처럼 원주는 불교문화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됐다.

◇강을 따라 형성된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
원주지역의 주요 사찰터들은 대부분 강 주변에 위치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이 있다. 이들 사지는 남한강과 섬강을 따라 형성됐으며, 불교문화가 지역 주민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원주시 문막읍에 위치한 법천사지는 고려 시대 불교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남한강과 가까운 위치는 물류와 교통의 편리성을 제공하며, 사찰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원주의 사찰터들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각각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법천사지는 남한강 가까이에 위치하며, 고려 시대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얼마 전 환지본처 된 국보 ‘지광국사탑’은 고려 불교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 법천사는 승려 교육과 수행의 요람으로, 불교문화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한 곳으로 알려졌다. 거돈사지는 섬강 유역에 위치하며,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원공국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요한 자연 속에서 수행과 명상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고려 초기 불교 건축과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흥법사지는 섬강을 따라 형성된 또 다른 주요 사지로, 이곳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 등은 불교미술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이곳도 사찰이 지역 주민들과 강을 매개로 긴밀히 연결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문화가 원주에 융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데다 강을 활용해 중앙과 지방을 연결할 수 있는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고려 태조가 불교를 국교로 삼고, 왕실의 안정과 사회 통합을 꾀하는 과정에서 불교문화 확산의 거점이 될 수 있었고, 왕실의 후원이 원주의 불교문화 융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옥한 토지는 농업생활을 활발하게 했고, 자연스레 지역 경제를 지원하며 공동체 형성의 중심 역할을 했으니 사찰 입지로는 이보다 적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