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판도라의 상자

박선이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겸임교수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유난히 분주함과 헛헛함이 엇갈리는 시간이다. 올해는 12월 3일 밤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한밤중 국회의 즉각 해제 표결, 새벽의 비상계엄 해제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며 픽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자비한 현실을 실감케 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대법원 유죄 확정과 수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의결-탄핵 심판 예고로 평범한 국민들 조차 이제 웬만한 정치평론가 수준을 넘어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정치 일정을 분석하고 있다.

을씨년스럽다. 지금 우리들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만큼 딱 떨어지는 말이 있을까. 내년 1월 20일 재선 대통령으로 취임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걸고 미국 최우선 정책을 예고했다. 12월 16일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당선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이시바 일본 총리, 심지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이름까지 입에 올렸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묻는 기자도 없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을 끌어들여 한반도의 정치 지형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 경제를 바탕에서 다져온 주요 산업의 미래도 쉽지 않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 때 ‘을씨년스럽다’고 말한다. 1920년대 조선어사전에도 을씨년스럽다가 나온다니, 100년 넘게 사회적 승인을 받고 있는 언어다. 120년 전 을사년에 우리 사회는 세계사적 격랑 속 난파선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위임받는 등 사실상 주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으로 한반도 침탈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해 7월 미국과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필리핀은 미국이, 대한제국은 일본이 지배권을 갖기로 이미 결정한 후였다.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정치와 군사 부문이 일본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대한제국 시종부 무관장이던 민영환이 자결로 순국한 뒤 전 의정대신 조병세를 비롯해 순국이 줄을 이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놓아 통곡한다)을 썼고, 전국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사회 전반이 침통하고 참담한 분위기였을 것이라고 어렵잖게 상상해볼 수 있다.

내년은 두 갑자를 돌아온 을사년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지식의 프레임 안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시간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마음이 어지럽고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때 꼭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판도라에게 남은 마지막 선물이다. 신은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주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호기심에 뚜껑을 연 순간, 상자 안에 갇혀있던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튀어나와 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절망에 잠긴 판도라에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 온다. “아직 내가 남아있어요…” 분노와 증오, 다툼이 빠져나간 자리에, 우리들에게는, 희망이 남아있다. 모쪼록 지혜롭게, 분노와 싸움이 아닌 희망의 언어로 2025년 을사년을 준비해볼 일이다. 내일 모레면 성탄절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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