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소(萬人疏)는 조선시대 상소의 일종으로 공론을 중시한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유생들이 조정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할 경우 1만여 명 내외의 서명을 받아 공동 명의로 조정에 의견을 제시해 반대 여론을 공론화하는 방법이다. 쉽게 말해 조선 시대의 범국민 서명운동인 셈이다. 조선 역사 기록에 남은 만인소는 정조 16년(1792년)을 시작으로 19세기 말까지 총 7차례 있었다. 최초의 만인소는 노론 관료 유성환이 정조가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에서 비롯됐다. 정조는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자기 관리가 철저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트집잡기에 발분한 영남지방 유생들이 집단상소를 올렸고, 그게 바로 만인소의 시작이었다. 당시 만인소에는 유성환의 처벌과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에 대한 처벌의 요구가 적혀 있었다. 여기서 진짜 무서운 것은 '만인소'라는 이름 그대로 상소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1만 명이 넘었다. 정확히는 1만57명. 사실 집단상소는 이전에도 있었고(1565년 백인소, 1666년 천인소) 그 전통이 만인소의 바탕이 됐다.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도) 1,500여 도민이 지난 10월28일 국회를 찾아 ‘제천~삼척 고속도로’ 조기 건설을 촉구하며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또 영월, 정선, 평창, 홍천, 인제, 양구와 경북 청송, 영양, 봉화, 영천 등 10개 시-군으로 구성된 ‘남북9축 고속도로 추진협의회’는 고속도로 건설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제출했다. 마치 조선 시대 백성들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올리던 상소문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 국가에서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상소문에 기대야 하는 현실은 강원도 주민들에게 주어진 불합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원도와 같이 SOC(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이 시급한 지방정부에서는 중앙정부에 읍소해야만 하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동서간 유일 축이었던 왕복 2차로의 영동고속도로를 4차선화할 때도 그랬고, 연장 40㎞에 2차로였던 동해고속도로의 삼척 연장 요구 때도 그랬다. 그리고 현재 중앙고속도로는 춘천에서 단절돼 있다.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김영삼 후보의 공약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공사중이다.
지난 10년간 수도권에는 300㎞가 넘는 고속도로가 새롭게 건설된 반면 강원도는 절반도 안 되는 123㎞에 그쳤다. 수도권 집중은 이미 전 국토를 뒤덮는 사회-경제적 문제로 지적돼왔지만, 강원도의 SOC 소외는 단순한 불균형을 넘어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대의마저 위협하고 있다. 강원도의 SOC 부족은 경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다. 즉, 지형적 특성과 낮은 인구밀도로 수익성을 기준으로 평가할 경우 사업 타당성이 확보하기 힘든 지역이 바로 강원도다. 그러나 SOC는 경제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국가의 핵심 기반시설이다. 국가 균형발전을 고려할 때 강원도는 SOC 구축에 있어 우선적으로 지원받아야 할 지역이다.
특히 강원도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국내 교통망의 중심축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강원도에 대한 SOC 시설 확충은 국가 발전적 틀에서 진단돼야 한다. 정부는 균형발전과 공정한 SOC 배분이라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강원도 주민들이 만인소를 들고 국회에 찾아가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정부가 먼저 나서야 한다. 강원도의 SOC 투자는 수도권 과밀 문제를 완화하고 국가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정부가 강원도의 작은 목소리도 가슴으로 크게 듣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강원도 주민들의 현대판 상소문은 그간 정부 정책의 소외에 갇혀 찌들대로 찌든 강원도가 내민 갱생안이자 울부짖음이다. 이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강원도 스스로 뭉치는 길 밖에 없다. 도 전체를 위한 마음으로 멀리 내다보고 공유와 협의를 통해 모두가 공감하는 일치된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 쉽지 않지만 그것 만이 첨단 디지털-AI 시대에 강원도 주민들의 현대판 상소문을 올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