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대중매체 속 실록이야기 ③영화 ‘사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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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김상로가 사도세자를 질타하는 내용이 담긴 영조실록 82권, 영조 30년 8월 29일 기사.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1694~1776)는 8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무려 52년.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렀던 임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금 27명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에게 대신 국정을 보게하는 ‘대리청정’을 시킨다. 영조는 탕평책을 쓰고 균역법을 시행한 성군(聖君)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형 경종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소문과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천민 출신이라는 출생 배경 등으로 인한 정통성 시비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영조는 자신의 나이와 정치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첨예한 당파 싸움의 파고 속에서 대리청정을 통해 사도세자를 빠르게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영조 앞에서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 영화장면 캡쳐

영화에서도 영조(송강호)가 사도세자(유아인)를 자신의 앞에 앉히고 균역법을 논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균역법이 실은 영조가 아닌 사도세자의 업적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장면이다. 앞서 사도세자의 스승들이 훈민정음과, 4군6진, 측우기가 세종대왕의 업적이 아닌 문종이 세자시절 대리청정을 하면서 이룬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마치 복선처럼 쓰인 것이다. 균역법이 시행된 것이 1750년이고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된 것이 그의 나이 열다섯이던 1749년이니 시간의 흐름을 볼 때, 개연성은 있어보인다. 하지만 실록에서는 1752년 병조판서 홍계희가 균역의 역사와 문제점, 균역법 시행 내용 등을 담은 책를 사도세자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내용을 사도세자에게 전달한다고 영조에게 허락받는 내용도 나온다. “ ‘이 일(균역법)은 백성과 국가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니, 이제 소조(小朝·사도세자)께서 대리(代理)하는 때를 당하여 이 일의 사의에 대해 한 번 그 전말을 진달해야 합니다.’ 하니, 대조(영조)께서 윤허하셨습니다.(영조실록 75권, 영조 28년 1월 13일)”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은 13년에 이른다. 이 기간 그는 주변의 과도한 기대감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영조의 질책과 원망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실록에서도 신하들의 잔소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온다. 1752년 흉조인 흰무지개가 나타나자 나라의 상황이 위기 상황에 처했으니 정사를 잘 살피라고 조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사도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자 재차 내용을 전달하기도 한다. “오늘날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어려움이 위태롭기만 할 뿐입니다. (중략) 선대 왕들이 재난에 대응하며 반성했던 사례들을 찾아내 시행하시기 바랍니다.(영조실록 75권, 영조 28년 1월 22일)” 조언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입을 다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며 공부 좀 하라는 질책도 이어졌다. 우의정 이천보는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상소를 올린다.

“침묵은 진실로 제왕의 배움입니다만 강학(講學)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침묵만 지킬 수는 없습니다.(중략)의문나는 부분이 있으면 신하들에게 물으시고, 영조께도 아뢰십시오.(영조실록 77권, 영조 28년 7월 15일)” 노론 벽파의 지도자로 사도세자 공격에 앞장 선 좌의정 김상로는 대놓고 언로가 막혔다고 질타하기도 한다.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근일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중략) 이것은 저하께서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영조실록 82권, 영조 30년 8월 29일·사진)” 사도세자를 반대하는 세력은 물론이고 그에게 우호적인 세력까지, 그들의 말잔치는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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