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종전(終戰)이 아니라 아직도 휴전(休戰)이기 때문이다.
당시 참전했던 국군과 학도병들은 어느새 아흔이 훌쩍 넘은 노병이 되어 전쟁의 산증인이 되었다. 나는 1년 중 6월과 7월이 오면 가슴이 아프고 섬뜩해서 잠을 설친다. 17세 어린 나이에 6·25전쟁의 지옥을 겪고 3년 후 7월27일 휴전협정으로 생명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수백만 명의 호국영령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 대한민국,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노무자로 있다가 겨우 탈출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3개월 후 다시 군에 징집되고 말았다. 이번엔 노무자가 아니라 6사단 7연대 10중대에 배속된 정식 학도병이었다. 1953년 여름, 어린 나이에 체구도 작았지만 M1 소총을 지급받고 화천댐 근방 고지에 배치되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경험이 없는 학도병들은 총알받이가 되기 쉬운 상황이었다. 7월27일 죽음의 공포가 목전에 다가올 즈음 한 장교가 산을 뛰어 올라오더니“휴전이 되었으니 학도병들은 귀가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휴전협정이 하루만 늦었어도 내 생명은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춘천 고 3학년에 편입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입학의 꿈을 접었는데 할머니의 친구가 “손자가 공부 잘한다니 내 손녀와 결혼하면 대학 입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954년 고려대에 합격해서 할머니는 약속대로 입학금을 보내주셨다. 입학식 전에 결혼식부터 올리자는 조건이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 이루어 백년해로를 앞두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1958년 정식으로 군에 입대해서 61년6월에 제대했다. 대학을 졸업 후 원주 육민관고 교사로 첫발을 내딛고 성수고 교사 19년, 성수여고 교감과 교장 12년간 교육에 봉직했다. 교사로서의 보람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2021년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강원특별자치도 회장이 되었다. 취임 후부터 꾸준히 도내 18개 시·군을 순회하며 안보교육을 하고 있다. 6.25를 겪은 세대들이 후세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려야 나라가 바로 서고 애국심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다. 전쟁을 잊은 나라와 민족은 멸망하기 쉽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춘천 토론회에서 "6·25 전쟁 최초의 승전보를 올린 춘천에서 역사를 체험하고 보훈문화를 확산할 수 있는 시설 건립을 위해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고 요청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난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유공자의 예우 향상과 강원자치도의 발전을 위해 남은 인생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전쟁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로지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현재 미국은 우방인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무기와 물자는 공급해도 직접 미군을 파병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국제정세는 각국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오물풍선 등 북한의 도발이 예사스럽지 않아 걱정이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 돼선 안 된다. 휴전 71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주국방으로 똘똘 뭉쳐서 어려운 시국을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