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참여와 관심으로 가꾸는 ‘건강돌봄 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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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지역책임을 묻다] ⑥주민의 생활을 지지하는 의료
가까이 있어 안심되는 지역병원 만들기

코로나19 대응이 한참이던 2022년 4월, 코로나19 환자 수가 강원특별자치도 내에서만 하루 1만명을 넘기는 등 유행 상황이 심각해지자 강원특별자치도는 입원치료 병상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강원도청 병상배정팀은 영서 농촌지역의 작은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찾아온 70대 환자가 위급하니 병상을 배정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팀원들은 도내 코로나19 병상 보유 의료기관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중환자 병상에는 들어갈 수 없는 환자였지만 '중등증환자' 병상은 전체 649개 중 429개나 남아있었다. 차례로 연락을 돌리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중등증환자 병상이 설치된 강원자치도내 11개 의료기관 중 환자를 받을 수 있다고 응답한 병원은 없었다. 환자는 결국 이송조차 되지 못한 채 숨졌다.

이와 같은 사례는 지역 주민들이 처한 비극의 단면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병상 부족’ 현상이 계속되는 동안 지역 주민들은 충분한 정보와 참여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채 일방적인 지침에 따라야 했다. 평상시에도 주민들은 멀고 복잡한 병원 시스템으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지역에 설치된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의료원의 기능은 제한적이다. 의료는 주민들의 생활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존재한다.

2000년대 이후로 지역사회 일부에서 주민 가까이에서 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 비중은 여전히 미미하다. 주민들의 생활과 가장 가까이 있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하는 병원은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지원센터·각 병원 공표 기준 정선군립병원을 포함해 전국에 5곳 뿐이다. 지역사회 자발적으로 의료와 돌봄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도 부족한 재정과 인력, 노하우는 현실적인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광역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지원하는 '역량 강화형 지방 분권' 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2019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운영중인 방문진료도 정작 각 지역에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원이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6월까지 전국적으로 참여 의원에서 3만4,308건의 방문진료가 이뤄졌으나 이 중 무려 57%에 해당하는 1만9,565건이 수도권 지역 참여 건수였다. 강원자치도내 참여 건수는 1,935건에 불과했다.

사진=연합뉴스

■주민이 지원하는, 주민을 지원하는 ‘건강돌봄 자치’

기초지방자치단체가 공공병원을 직접 설립하고, 운영까지 책임지는 사례가 상당 수 존재하는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시정촌(市町村) 설립 공공병원 603개가 있다. 시·군·구가 설립·운영하는 병원이 전국 5개(정선군립병원, 목포시의료원, 성남시의료원, 울진군의료원, 진안군의료원)뿐인 한국의 현실과 대비된다.

시정촌 설립 공공병원은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병원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운영한다. 주민들은 병원을 이용해야 하는 때 일부러 지역 병원을 찾아 진료수익을 보탤 뿐 아니라 병원의 의사결정에도 참여한다. 주민이 원하는 방식의 의료와 돌봄을 구현하는 '건강돌봄 자치'다.

■건강과 돌봄을 하나로…생활을 지지하는 정립병원

◇이와미정립 이와미병원 안에 정 행정복지센터의 복지사무소가 설치돼 있다.

돗토리현 내에도 상대적으로 의료 자원이 부족한 지역을 중심으로 5개의 정(町)립병원이 주민들의 생활을 지지하고 있다. 돗토리현 이와미정이 설립한 ‘이와미병원’ 이 대표적이다. 이와미정은 돗토리현의 중심부인 돗토리시에서 전철로 약 30분이 걸리는 어촌지역이다. 특징은 병원 안에 행정복지센터의 복지 부서가 함께 들어와 있는 점. 환자들이 치료 후 일상 회복에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병원까지 오고가기 어려운 고령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방문 진료도 병행 중이다.

오자키 타카유키 원장은 "지역 의료기관으로서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우리는 거기에 '생활' 까지 지킨다는 의미를 가진 병원"이라며 "여기서 생활이란 지역 만들기의 개념, 지역의 문화를 지키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개념" 이라고 말했다.

/주민이 바라본 지역의료/

"가까이 있어 안심되는 정립병원…주민이 운영도 참여"

지역의 소규모 의료기관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다. 일본의 풀뿌리 지역사회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토라이 사에코(71) 씨는 돗토리현 이와미정에 거주하는 주민이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와미병원에서 정기적인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지역 병원과 의료를 어떻게 지지하고 있을까.

◇토라이 사에코 씨

▷지역 병원은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인가="정립병원이 없으면 안심하고 살 수 없다. 돗토리현립병원까지 차가 있으면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리는데 차가 없으면 버스로는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정립병원이 없으면 응급의료는 심각한 상황이 된다고 생각한다. 24시간 운영하는 병원이 가까이에 있으니 생활도 안심된다."

▷좀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는 없나="이웃 중에는 시립병원이나 현립병원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이 운영하는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나도 민간 의원 등에 갈 수도 있지만 병원의 경영에 도움이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와미병원을 이용한다. 하지만 재정 면에서는 병원이 자생적인 구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현이나 시가 지원해줄 수 있지만 병원 자체적으로 수입과 경쟁력을 얻었으면 좋겠다. '정'이 책임감을 가지고 운영해 주기를 바란다. 다만 돗토리대병원에서 의사를 파견해 주는 점은 고맙고, 인력은 지역에서 더 많은 교류와 지원이 필요하다."

▷주민들은 병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나="주민위원회가 있다. 나도 2019년부터 참여 중이고 현재는 1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병원의 운영에 대해서 발언한다. 경영 상황에 대해서도 자료를 받고 논의한다. 주민의 관점에서 병원에 질문을 한다. 주민들이 병원의 경영 상황에 대해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병원의 운영 상황을 고려할 때 간호사를 채용결정 하는지 마는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최근 병원 운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병원은 최근 진료과목이 늘어났는데 진료과목이 늘어난 것은 주민으로서는 기쁘다. 시내까지 나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병원이 경영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병원을 더 개방해서 포괄적인 건강돌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양사나 물리치료사 등이 주민들의 만성질환관리에 도움을 주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지금 재택진료도 일부 하고 있기는 하지만 확대가 필요하다. 지역에서는 건강관리를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마을마다 방문해서 해 주면 좋겠다."

■'풀뿌리' 의 힘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병원이 홀로 어려움을 감당하게 하지 않으려면 지역사회의 공익적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체계가 필요하다. 일본의 지역의료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체계는 ‘공익형 민간병원’ 이다. 운영 형태는 민간이지만 공익적인 목적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의료와 복지, 주민 생활을 지지하는 병원이다. 설립은 민간에서 하더라도 풀뿌리 지역사회운동 네트워크가 공공의료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만들 수 있다. 실제 일본의 각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발달한 '생활밀착형' 풀뿌리 지역사회 시민 조직들은 지역의 공공의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자 일본의 '중앙집권'을 견제하는 지방자치의 저력이다.

◇제 2차세계대전 이후 노동자, 농민, 빈곤층의 의료를 위해 1953년 설립된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은 일본 지역 시민사회 운동의 산실이다. 사진=민의련 홈페이지 캡쳐. "의료비로 인해 곤란한 분은 상담을 요청해 주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써 있다.

특히 제 2차세계대전 이후 노동자, 농민, 빈곤층의 의료를 위해 1953년 설립된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 의 행보는 의료와 시민운동이 지역을 매개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민의련은 2023년 현재 일본 전국 각 지역에 약 1,7000곳의 병원을 설립하고 마을 만들기 운동이 결합된 의료와 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공공병원으로는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재활 등의 기능을 맡아 주민의 호응도 높다. 운영에는 조합원으로 등록된 주민들이 활발하게 참여한다.

■지역에 ‘필요’한 의료 찾아내는 ‘가까운 병원’

돗토리현에 위치한 '돗토리생협병원' 도 민의련 소속 병원 중 한 곳이다. 260병상 규모에 급성기, 아급성기, 재활의료병동까지 갖추고 있다. 급성기에서 회복기 사이의 환자, 혹은 요양시설로 돌아가기에는 의학적 돌봄이 필요한 환자들은 '지역포괄케어' 병동에 2개월까지 입원 가능하다. 후생노동성의 '병상 감축' 방침에 따라 일반적으로 긴급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입원하는 병상, 일명 ‘급성기’ 병상을 줄여 만든 44개의 병상이다. 만들어진 이후에는 급한 치료는 끝났어도 요양기관이나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고령 환자 치료 등 긴요한 역할을 도맡고 있다.

◇돗토리생협병원의 재활병동에 설치된 시설. 환자들이 회복 이후 원활하게 주거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설치했다.

돗토리생협병원은 감기와 감염성질환 등 주민들이 병원을 찾게 되는 흔한 질환 뿐 아니라 암수술, 충수염, 담낭염, 치질 등 발생 빈도수가 높은 대부분의 외과 질환까지 커버하고 있다. 일부 안과 수술을 제외하면 지역사회에서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질환은 빠짐없이 담당하는 범위다. 260병상 규모를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지역 민간병원들이 척추·관절 위주의 비급여 진료로 수익을 내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미나기 신이치 원장은 "경영상의 어려움, 의료 환경의 변화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무도 뒤쳐지지 않는 의료를 목표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 나가고자 한다" 고 말했다.

◇ 돗토리생협병원 안에 설치된 젠더중립 화장실

■ ‘의료’, 지역 시민사회의 한 울로

한국에도 민의련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바로 '한국사회적의료기관연합회(사의련)'다. 의료의 사회적, 공공적 역할에 가치를 두는 의료기관들의 연대 모임으로 80개 의료기관이 소속, 환자와 보호자,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의료를 지향하고 있다. 강원자치도 내에도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강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구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 속해있고, 방문진료 등을 선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향후 보다 ‘가까운’ 지역 건강돌봄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공익형 민간병원’ 의 행보를 생각할 때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신천연합병원의 사례는 주목할 만 하다. 1980년대 서울 도심이 개발되며 철거민들이 당시 '신천리' 라고 불리던 시흥 인근 지역에 자리잡게 되고, 의사 3명이 주민의 건강증진과 의료문제 해결을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병원은 1999년 종합병원으로 승격한 뒤 2023년 현재까지 지역 주민이 필요로 하는 '의료' 와 '복지', 지역사회 자원 연계를 사업의 중심에 두고 있다.

◇신천연합병원의 방문진료 현장

김정은 원장은 "의사가 한 명인 병원은 환자와 주치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병원은 가족을 통합해서 봐줄 수 있다" 며 "한 가족이 위기 상황일 때는 질병 외적인 사회적 자원을 연계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어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고 말했다. 병원에서 운영 중인 '마을건강센터' 와 '작은별 프로젝트'는 그러한 생각의 산물이다. 마을건강센터에서는 주민 중 의료비 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지원을 연계한다. 의료와 복지가 분절되지 않고 주민의 삶 속에서 통합되는 과정이다. 마을건강센터에서 운영중인 작은별 프로젝트는 지역 어린이들에게 공동체가 의료, 돌봄, 놀이, 운동, 교육서비스를 지원하고, 가족과 어린이가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사업은 작은별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운영된다.

튼튼한 중소병원의 존재는 어린이를 기르고 노동하는 일상을 지키는 버팀목이 된다. 신천연합병원의 경우 소아청소년 입원진료를 유지하기 위해 인력과 시설, 지역 의사들과의 네트워크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대한 지역사회의 지지도 높다. 수도권에 위치한 시흥이라는 지역사회 자원은 인력을 비롯해 다양한 인프라 동원을 가능케 했던 점도 주요한 ‘성공’ 요인이다. 강원자치도와 같은 농어촌지역에서는 어떤 대안이 가능할지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김정은 원장은 "우선 중소병원의 디테일한 계획이 필요하다" 며 "이웃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엮고, 소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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