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화단상]`능소화'와 아름다운 여름

이덕림 중국 단둥 재무중전 한국어 교사 전 매일경제 기자

'하늘을 범(犯)한 꽃'이라는 뜻이 담겨 있어 예전엔 여염집에선 기르지 못하게 했다는 꽃, 특히 농촌에선 예로부터 '장마를 알리는 꽃'으로 여겨져 꽃봉오리가 맺힐 즈음이면 집 둘레에 물길을 내고, 벼논의 물을 빼내는 등 채비를 하도록 귀띔해 주는 꽃, 꽃말이 '그리움'인 점을 좇아 이해인 시인이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라고 노래한 '연가(戀歌)'의 제목이 된 꽃.

지금 한창 제철을 맞은 꽃, 능소화다. 예보대로 올여름 장마는 끝났다. 하지만 능소화의 개화는 계속될 것이다.

유독 꽃들에겐 시련기일 수밖에 없는 장마철을 택해 꽃봉오리를 여는 능소화는 못지않게 유별난 데도 있다. 무궁화처럼 날마다 피는 꽃, 일일화(日日花)다. 아침에 피어나서 저녁이면 진다. 애석한 단명(短命). 그러나 마지막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시들어 추레한 모습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꽃잎도, 색깔도 흐트러지거나 변색되지 않은 채 살포시 내려앉는다. 산뜻하고 다소곳한 낙화(落花).

독특하다 싶은 생태만큼 꽃 색깔 또한 신비롭다. 단색이 아닌 복합색이다. 꽃잎 바깥쪽은 밝은 오렌지색, 꽃술이 있는 안쪽으로 갈수록 불그스레함이 감도는 금빛을 띤다. 그러데이션(Gradation)화법처럼 차츰차츰 색조가 짙어진다. 화심(花心)은 무지개의 두 번째 색을 닮은 선명한 주홍빛이다. 천상의 선녀들이 입은 천의(天衣)의 색이라고 할까.

비밀스럽기까지 한 능소화의 수려함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자태를 보려면 때가 있다. 잠시 비가 멎고 구름이 빗긴 틈을 타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드러난 때, 청라에 수를 놓은 듯 창공을 배경으로 활짝 핀 꽃송이들이 떠오르는 그때. 시야에 황홀경이 펼쳐진다. 곧 능소화를 화폭에 담긴 그림처럼 감상하는 방법이다. 되도록 몸을 낮춰 앙각(仰角)을 높여서 하늘을 캔버스로 삼고 올려다보는 자세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이 극대화한다.

'Chinese trumpet creeper'라는 영어 이름이 말해주듯 능소화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 고향이고, 줄기차게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특성을 지닌 덩굴나무다. 흡착기능을 하는 공기뿌리를 DNA 속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 뜻풀이를 볼라치면 의당 하늘 앞에 '무엄하다' 싶은 이름이다.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의 궁전을 '능소전'이라 부르는 것으로 미뤄 범상치 않은 작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아침 철원군청에 전화로 물으니 그곳에도 능소화가 만발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대(暖帶)에서 옮겨온 터라 중부 이북에선 좀 낯선 화목이기도 했으나 이젠 우리 땅 거의 모든 지역에 고루 퍼져 정착했으니 토착식물로 대접해도 좋지 않을까. 대표적인 여름꽃으로 여름을 장식해 주고 있음이 고맙지 아니한가.

임우(霖雨)와 염천(炎天) 아래에서도 곱고 여린 꽃잎을 열어 여름내 전국 어디에서나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는 능소화. 능소화가 있어 여름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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