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어수 공원에 도착해 걷다가
'옛고향'이 새겨진 시비와 마주쳤다
옛날 산골 풍경이 떠오르는 시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찾아온 노시인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낙담한 시인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래, 어머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의 골짜기엔 캠핑장이 들어섰다
해먹에 누워 잠든 사내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는 여자
어디선가 날아온 고기 굽는 냄새
숲과 개울이 어우러진 그곳은
김어수 공원이자 피서객의 유원지였다
고향을 노래한 그의 시는
자본주의적으로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내 자라던 옛 고향을 / 오늘 다시 찾아 드니 // 살던 오막사리 / 그마저도 헐어졌고 //어머니 물 긷던 샘도 / 묻혀지고 없구려. // 아버지 이 돌에서 / 밥때마다 불렀는데 // 가신지 그 동안에 / 사십년이 되단말가 // 엎드려 흐느끼는 이 자식 / 나도 털이 희였소. // 봄이면 산채 캐고 / 가을이면 버섯 줍고 // 석양에 거적 깔고 / 통감 사략 읽던 곳이 // 어데가 어데쯤인지 / 솔만 우묵하구려 // 지팡이 던지고서 / 잔디 밭에 앉으니 // 어느덧 눈물 흘러 / 옷깃이 적셔지고 // 낯설은 젊은 사람들 / 힐끗 힐끗 보는 걸. // 고의 벗고 같이 놀던 / 그 때의 어린 동무 // 모두 백수 노인되어 / 서로 봐도 모르다가 // 성명을 통하고 나서야 / 겨우 손을 잡다니. // 내 심은 버드나무 / 아름넘는 고목인데 // 뒷산 진달래는 / 오늘도 붉어 있고 // 시냇물 흐르는 속에 / 어머니 얼굴 보이다.('옛고향' 중에서)
영담(影潭) 김어수(魚水)의 시조를 읽는다. 1976년에 발간된 그의 첫 시조집 '회귀선(回歸線)의 꽃구름'인데 내가 들고 있는 것은 영월문화원에서 2009년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재발간한 시조집이다. 마음에 드는 몇 편의 시를 골랐는데 무더운 한여름임을 고려하여 덥지 않은 시와 그의 고향이 강원도 영월이니만큼 옛날 산골 풍경이 떠오르는 시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스님으로, 교육자로, 시조시인으로, 불교포교사로 한 생을 건너간 그의 인생에서 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시가 그의 마음속 어떤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의 '김어수 공원'을 걷다가 마주친 시비가 '옛고향'이다. 사실 시조라는 형식에 대해선 학창시절에 주워들은 게 전부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내용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시인은 어릴 적 살던 고향집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자연밖에는. 낙담한 시인은 흘러가는 시냇물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래, 모든 것은 사라져도 어머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산 중중(重重) 길도 멀다 / 영월 정선 험한 재를 // 주막집 호롱 아래 / 파고 드는 조각 꿈이 // 구멍난 때묻은 소매 / 구비 구비 저리오. // 구름 겹겹 아득하다 / 진 종일 황토 길에 // 나룻배 저녁 바람 / 보릿골을 흔드는데 // 등에 진 괴나리 봇짐 / 그도 하 마다 낡았오.('나그네' 중에서)
강원도의 옛 산길, 물길, 그리고 주막집이 등장한다. 영월, 정선으로 가는 길엔 재와 고개가 많다.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그 옛날 강원도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무수한 재와 고개, 영(嶺)을 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곳에 주막이 있으니 나그네는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한다. 물길도 있었다. 봄날 서풍에 맞춰 소금을 실은 자그마한 배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 단양, 영월, 정선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길 위의 사람들은 돛단배에서, 고갯길에서, 주막에서 조각 꿈을 꾸며 지친 몸을 달랬으리라.
구름 영(嶺)에 묻어 날고 / 오동잎 뚝뚝 지다 // 강 바람 흩이는 하늘 / 황토 길 저 멀리 해가 지는데 // 배 떠난 주막집 초롱 아래서 / 별을 헤다 섰는 마음. // 꽃잎 물 따라 흐르고 / 달도 산을 넘어 지는 밤에 // 아스름한 그 사랑 / 되뇌이며 걷다가도 // 그늘진 계절 앞에서 / 내가 나를 또 찾소.('세월' 중에서)
우리는 돛단배를 타거나 걸어서 고개를 넘지 않았다. 자가용으로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영월 김어수 공원에 도착했다. '영담 김어수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비'가 거대한 자연석에 새겨져 있었고 그 뒷면에 시 '봄비'가 적혀 있었다. 기념비 옆에는 캠핑 온 사람들이 쳐 놓은 텐트와 차량이 자리하고 있었다. '옛고향'이 새겨진 시비, 흰 빛이 도는 동상과 그 아래 새겨진 '영산(影山)'이라는 시, 그 뒤편 소나무 아래의 텐트와 자가용, 그 옆 텐트와 자가용, 물놀이 하는 사람들, '김어수 생가지'라 적혀 있는 받침대와 그 위의 흉상, 소나무 숲과 맑은 개울이 어우러진 그곳은 '김어수 공원'이자 피서객들의 유원지였다. 시인 김어수는 '옛고향'을 자본주의적으로 다시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더 깊은 산촌으로 고향을 옮기거나.
구름 영을 넘어 / 만리 고요한데 // 희 붉은 놀빛 / 청산을 쓸고 // 새하얀 매화 봉우리 / 하나 방긋 피다니. // 하도 부끄러워 / 목련송이 고개 지고 // 창가 개울 소리 / 책장에 번져 들고 // 산 사람 외로운 무덤에도 / 잔디 싹이 솟는다. // 볕 바른 뜰가 / 병아리 조울고 // 젊은 아낙네들 / 쑥 씻다 하늘 보고 // 이웃집 늙은 영감이 / 쟁기 지고 나선다.(산촌춘정)
봄날의 산촌 풍경을 건너가는 시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외로운 무덤에서 돋아나는 싹을 보다니……. 시인은 마치 징검돌을 하나씩 건너듯, 구름까지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듯, 절제된 시선으로 생명 있는 것들의 부끄러움과 나른함, 그리고 힘을 보여준다. 관점을 달리하면 마치 윤회의 만다라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이제 봄을 떠나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좁은 바라지 틈에 / 볕살이 따가운데 // 뜰가 해바라기 / 고개 남으로 돌아가고 // 뒤원에 아람 껍질이 / 톡톡 트는 한나절. // 높은 잿마루 / 구름이 묻어 날고 // 목화밭 두렁 / 소낙비 지나간 뒤 // 저 건너 초가 지붕에 / 고추 빛이 빨갛다. // 쪽물 뚝뚝 듣는 하늘 / 만리에 카랑하다 // 낙엽도 애닯파라 / 한 잎 또 한 잎을 // 마을 뒤 개울 옆에는 / 산 그늘이 내리고.
'바라지'는 방에 햇빛을 들게 하려고 벽의 위쪽에 낸 작은 창이라고 한다. '아람'은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라고 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산촌의 가을'이다. 김어수는 1980년 제 5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하는데 심사평은 이렇다. '김어수는 시조가 아직 현대시로 정착하지 못했던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에 전념, 마침내 시조를 현대시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일익을 담당했다. 더불어 시조시인으로 시조를 불교정신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독보적인 진경을 보임으로써 종교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부산 범어사로 출가했던 김어수는 25년간 승려생활을 했다. 법명은 어수, 본명은 소석(素石), 호는 영담이다. 그의 시 '격외(格外)의 의미'를 펼쳤다.
구름 한 점 / 허공에 날다 사라지다 // 가는 바람결 / 연잎을 흔들고 지나가다 // 색공(色空)이 불이(不二)한 뜻을 / 이제 분명 보았다. // 뜰 앞 냇물에는 / 물도 달도 다 흐르고 // 쉬는 이 숨결이 / 겁(劫)으로 통한 밤에 // 오감이 없다는 깊은 그 의미 / 눈에 환히 보이다. // 산당(山堂)에 홀로 앉아 / 별 바라고 놀다 보니 // 나무 잎 하나 날려 / 창을 치고 떨어진다 // 동(動)과 정(靜) 하나란 말을 / 더욱 한번 느끼다.
김어수의 시비 근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구름 한참 아래의 산 능선을 따라가다 돌아왔다. 소나무의 우듬지에 앉았다가 떠나가는 새 한 마리를 쫓다가 놓쳤다. 해먹에 누워 잠든 사내,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는 여자, 어디선가 날아온 고기 굽는 냄새. 영월 녹전을 떠나 상동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산모롱이를 돌면서 자취를 감췄다.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인의 골짜기를 떠날 시간이었다.
강물이 휘어 감은 / 산 비탈 작은 마을 // 초가 몇 집 양지 바리 / 버섯처럼 오붓하고 // 동구 앞 늙은 숲에서 / 까치 소리 들리다. // 함양 산청 먼먼 길에 / 눈 바람이 차가운데 // 삼십리(三十里) 장꾼들은 / 오는데도 안 보이고 // 황톳재 저쪽 넘에는 / 어둡사리 덮이다. // 호박 죽 한 그릇을 / 이웃끼리 노나 먹고 // 겨울 밤 겨웁도록 / 짚신 삼고 새끼 꼬고 // 서투른 삼국지 이야기 / 신이 나서 한다우.
그의 시 '산촌한정(山村寒情)'이다. 이 골짜기에도 곧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