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조국과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발자취 시로 일깨워준 큰 스승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민족을 사랑한 영담 김어수 시인 - 신대식 시조시인

1909년 1월4일 영월에서 태어나

9세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 떠나

한학자였던 아버지·어머니 여의고

13세 때 부산 범어사에 출가

일본서 중학과정 공부하고 돌아와

젊은 나이에 불경 번역 등 활동

한국 최초의 동양불교 전문학교 다녀

큰 스님으로 불자들의 마음 다스려

1933년 '弔詞(조사)' 등 발표하며 등단

시조시인으로 이름 널리 떨치기도

승려 시절 '불교 청년동맹회' 가담

독립운동 모의해 1년간 옥고 치러

25년간의 승려 생활 마치고 환속

중·고교 교사·교장으로 학생들 가르쳐

서정주·김달진 선생 등과 친분 두텁고

민족지도자 만해 스님도 곁에서 모셔

시간이 허락할 때면 방랑길 떠나

조국의 성산 백두산·한산도 찾아

단군과 백성의 역사 되새기고

성웅 이순신 장군의 충절 읊어

강원인을 넘어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오직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역사 속의 영담 김어수 선생의 삶을 재조명한다.

김어수 시인과 필자의 이야기를 잠시 해 본다.

원주에 있는 중방 선생(시인)이 전화를 주곤, 대뜸 “김어수 시인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군에 근무할 때 선생의 시를 좋아했었다고 했더니, “어수 시인이 영월 사람이니 영월 사는 당신이 선양사업을 이끌어 주시면 좋겠습니다”하면서 “그러나 어수 선생의 자료가 많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아쉽게 통화를 마쳤다.

이후 어수 선생의 자료를 찾아 사방으로 지역신문에 글을 써서 수차례 발표하는 등 인터넷을 통해 검색했지만, '임시정부의 수반 김구 선생께서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 오실 때 한국의 문인을 대표해 영접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신 분'이란 단 한 줄 외에는 그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 내가 군생활하고 있을 때까지 김어수 시인은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는 애국자적인 삶을 사신 분인데….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있던 중 아침 일찍 전화 벨소리가 귀를 끌었다.

전화를 받으며 누구시냐 여쭤보았더니 “영담 김어수 시인의 선양사업을 위해 선생의 자료가 필요치 않으십니까” 라고 말문을 연 그분은 김어수 시인의 제자 스님(상욱이란 절의 기도법사)으로, 선생의 모든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며 그 자료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전화통화를 한 지 사흘 만에 깜짝 놀랄 만큼의 필요한 자료가 큰 상자로 필자에게 배달됐으며, 그 후 영담 김어수 선양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만나뵙지도 못한 어수 선생과의 운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선생의 본명은 소석(素石). 한학자인 아버지 김정호와 어머니 박승분의 사이에서 독자로 1909년 1월4일 영월군 상동면(현 중동면) 직동리에서 출생했다. 김어수 시인이 24세 때 승려로 있을 때, '불교 청년동맹회'(현재 대한불교청년회의 전신)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발각돼 부산 동래경찰서에 수감됐다. 이후 부산지방법원 판결에 의해 1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서 출감했다. 이 같은 사실은 김어수 시인의 수필집 '가로수 밑에 부서지는 햇살' 70쪽에 나와있다.

필자는 9세의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 영월을 떠나 11세에 친척 하나 없는 천애의 고아로 자라며 배고픔을 참지 못해 부산의 범어사에 출가한 선생의 일생을 알게 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수 선생의 부친(김정호)은 국가와 민족의 수치인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고종황제에게 수차례 상소를 올린 관계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위험을 느끼고 한양에서 고향 영월로 피신한다. 피난길이 아닌 야반도주의 신세가 돼 지금의 부산 범어사에 들어가 범어사의 소속된 일을 하던 중 세상과 등지게 된다. 이듬해 어머니마저 아버지 곁으로 떠나신 후 천애의 고아가 배고픔을 면키 위해 이발소의 머슴이 되었다가 1년 후 13세 때 범어사에 출가한 승려가 되면서 선생 일생일대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중학교 과정, 즉 신(新)문명을 배우고 돌아와 젊은 나이임에도 불경을 번역하는 등 고향 영월에 있을 때 이미 '자치통감'이란 책을 다 배우리만큼 천재적 자질이 있어 선생의 곁에는 훗날 이름을 크게 떨친 인사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미당 서정주 선생과 김달진 선생, 그리고 태백산맥의 저자인 조정래 소설가의 부친인 조종현 시인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던 분들과 격의 없는 사이가 됐다.

한국 최초의 동양불교 전문학교(동국대의 전신)를 다니는 등 큰스님으로 수많은 불자의 마음을 다스리며 참 인간의 길을 설하셨다.

25년간의 승려생활을 마치고 환속, 경남과 부산 일원에서 중·고교 교사, 교감, 교장 등 25년간 학생들의 큰 스승으로 생활했다.

선생의 제자인 김영배 시인은 선생을 아버지 같은 분이라 했으며 부산 선원(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위패를 모신 곳)의 선진규 법사나 태고종의 정종반열에 오른 활안 스님 같으신 분들은 지금도 “어수 법사는 우리 같은 범인이 아니요, 그분이 천상에 계신 고고한 인품과 경륜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분”이라고 극찬을 하시며 기억하고 있었다.

어수 선생은 1933년 '弔詞(조사)'를 조선일보에, '고향'을 조광(朝光)에 각각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37년 '안락국태자경' 저작 이후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현대문학, 월간문학, 현대시학 등 주요기관에 계속 발표하며 시조시인의 이름을 널리 펼쳤다.

선생은 시간이 허락하면 배낭 하나 걸치고 방랑길을 나섰다. 멀리 함경도에 있는 조국의 성산 백두산을 찾아 나선 시인은 '백두산'이란 시를 남겼다.

낭림산맥 뻗은 자리 무산고를 펼쳤는데/구천척 백두산은 하늘을 받혔구나/천지의 웅장한 모습 그저 송연 하나이다// 천리천평 박달나무 단군님이 하강하고/ 이 나라 처음 열어 백성에게 이를 적에/인간을 홍익하란말 억만년에 빛나랴// 북으로 만주벌판 남으로 삼천리를/압록 두만 두강물이 여기서 갈라지고/관모봉 주춤주춤흘러 금수강산이구나//(백두산)

백두산을 읊은 시를 읽으며 함경도를 지나면서 고을 이름과 단군님과 백성과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도 백두산의 장엄을 송연하다고 옷깃을 여미는 시를 음미하면서 선생을 생각하다가 다시 시집을 살피니 저 남쪽의 한산도를 노래하며 이순신 성웅을 선생의 시에서 만났다.

남쪽바다 끝머리에 늙은 솔 흰학이/ 푸른물 구비밖에 우뚝 높은 제승당을/ 왜적을 몰살한 거기가 바로 저기 저섬인데// 충절용맹 다 갖추신 이장군이/ 이 민족을 구하려고 거북선 만들어서/ 널따란 이 바다 지키며 추한 적을 무찌르다// 바다보다 장한뜻을 하늘에 빌것가/등구신 그 인격을 땅에다 겨눌것가/사당문 조용히 열고 향사르고 있답니다//(한산도)

“나라를 지켜내신 성웅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서 제승당에 올라 조용히 향사른다”는 선생의 마음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인품을 생각해 본다.

잠시 어수 선생과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큰스님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하루는 서울 인사동쯤 되는 거리에서 만해 스님이 합죽선을 사려고 상점에 들러 주인에게 합죽선을 사자고 하면 주인이 합죽선은 없고 그냥 부채, 즉 일본식 부채만 내놓았다. 여러 상점을 돌던 중 한 상점에 들어가서 주인이 합죽선이 없다고 하자 만해 스님은 주인에게 벽력같이 큰 소리로 “왜놈 물건만 팔고 우리 것은 왜 팔지 않느냐”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 나가시니 난감해진 것은 어수 선생이었다.

상점 주인이 화가 나서 내가 합죽선을 만드는 사람도 아니며 더욱이 요즘에는 합죽선이 나오지 않는다며 화를 내자 어수 선생이 말리며 저 큰스님은 33인 중 한 분이신 만해 스님이니 이해해달라고 요청했고, 상점 주인은 “아 그랬군요”하며 만해 스님의 뒷모습에다 절을 했다고 한다.

한때 만해 큰스님을 모시고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마치며 다시 어수 선생을 따라 시 속의 여행을 떠난다. 이번엔 금강산이다.

단발령 넘어서니 장안사가 바로 뵌다/ 과가연 표훈사는 어느골에 묻혔는고/ 조물주 정교한 솜씨 다시한번 느끼다// 산과 구름 같이 히니 산과 구름 알 수 없고/ 만 이천봉 굽이굽이 바위마다 물형인데/ 비로봉 높은 꼭대기 안개 훨훨 날으다// 벼랑에 붉은솔이 바람에 흔들리고/ 만폭동 물구슬에 단풍이 비치는데/ 보덕굴 외나무다리 허공위에 뜬듯하다// (금강산)

금강산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선생의 시로 인해 편하게 집에서 금강산을 돌아보고 다시 선생을 따라서 저 멀리 압록강을 만나러 선생을 따라나선다.

이 강을 사이두고 두나라가 갈렸는데/ 험한산 굽이돌아 팔백리가 멀었구나/ 그날의 뗏목 노래가 들릴듯한 이저녁// 유난히 푸르다고 압록이다 이름하고/ 연개소문 임경업이 북벌하러 넘던 물결/ 진남포 서쪽바다로 흐른 것이 몇만년가// 오랑캐들 떼를 지어 어름위를 밟고 올 때/ 양만춘 큰 화살이 적장의 눈을 뚫고/ 이국토 천년 사직을 바로 세운 이 강인가// (압록강)

선생의 시조 작품을 읽고 조국의 강산과 이 민족의 삶을 살필 수 있었고, 역사의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이 발자취를 다시금 일깨울 수 있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제자의 학문을 짜깁기 하는 스승이요 조국과 민족을 앞세우며 배금에 물든 현실 앞에 영담 김어수 시인을 다시 현실에 조명하고, 강원도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선생의 마음을 높이 받들어야 하는데 선양사업을 시작한 필자도 12년이 지난 지금도 지지부진이라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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