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해리고지 우리가 지켜냈다”

오늘 6·25 62주년

◇6·25전쟁 당시 해리고지 전투 UN참전용사가 24일 청성OP를 방문, 산화한 전우들에게 헌화하고 있다.

1953년 전투 UN군 참전용사·유족들

보훈처 초청으로 중부전선 청성OP 찾아

산화한 전우 114명에 59년 만에 헌화

“강원도 최대의 곡창 철원벌판을 지켜낸 59년 전 해리고지 전투를 아시나요.”

24일 오후 2시 중부전선 최전방 청성OP에서는 80세를 훌쩍 넘긴 벽안의 미국인 노신사들과 유족 등 10여명이 6·25전쟁 당시 이곳으로부터 3.5㎞ 앞 해리고지에서 산화한 114명에 이르는 전우의 넋을 기리고 헌화했다. 이날 행사는 국가보훈처가 6·25전쟁에서 UN군으로 참전한 참전용사와 그 가족 등을 초청해 참전에 대한 보은과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해리고지 참전용사와 그 가족 및 유족들이 철원을 방문해 이뤄졌다.

김화와 철원, 평강을 잇는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 정중앙에서 벌어졌던 해리고지전투는 6·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6월10일부터 18일까지 9일 동안 벌어진 전투. 해발 350m에 이르는 나지막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 4개 연대에 대응해 미 3사단 소속 4개 중대 및 그리스군 1개 중대, 한국군 카투사 등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참전용사 도널드 아쉘 채스씨는 “전투 직전 전쟁이 끝나간다는 말이 돌았는데 중공군이 대거 쳐들어왔고 상부로부터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고지를 지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미군은 해리고지를 빼앗길 경우 남쪽으로 10㎞ 이상인 포천 방면으로 철수가 불가피했으며 중공군은 미군의 저항선 구축 및 포병 유도 제한 등으로 인해 서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전투 기간 포탄 8만8,000여발, 미군은 36만8,000여발을 쏟아 부으며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중공군 4,200여명이 죽고 5,0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과 그리스군은 전사 114명, 부상 533명 등 비교적 적은 피해로 고지를 지켜냈다. 해리고지전투 이후 휴전협정이 진행되면서 자칫 38선 이남 경기도 포천까지 밀려날 뻔했던 휴전선이 철원지역에 설정된 배경이 됐다는 설명이다.

참전용사들은 청성OP 근무장병들이 '해리고지라는 명칭이 어떻게 탄생했느냐'고 묻자 “알파 브라보 찰리 등등과 같은 암호식으로 이곳을 해리고지라고 부른 것”이라고 밝혀 그동안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참전용사 에드윈 H 커츠씨는 “해리고지생존자연합회 회원은 현재 약 160명쯤 되고 '우리가 지켜냈다(We Held)'는 구호 아래 지금도 모임을 갖고 있다”고 했다.

참전용사들은 “전쟁 당시 어제까지 정담을 나눴던 동료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는 걸 보는 게 가장 힘든 고통이었다”며 “그러나 전사한 전우들과 우리는 마침내 고지를 지켜냈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전용사들은 필승전망대 월정역 노동당사 등 안보관광지를 둘러본 후 오후 늦게 귀경했다.

철원=이정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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