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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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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속에 기록된 반란의 이름, 은둔 선비 ‘이인거’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의 기록, 횡성발 모반 전말

횡성에 거주사는 유학자 진극일이 이인거의 난에 대해 고변하는 내용을 담은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의 첫 장. 사진=규장각한국학연구원.

1627년(인조 5) 9월 말, 횡성의 고요한 산골 마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인거(李仁居)라는 이름의 한 은둔 선비가 무리를 이끌고 횡성현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하며 반란의 기치를 치켜든 것이다. 조선 왕조를 뒤흔든 여러 모반 사건 중에서도 강원도 한복판에서 일어나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이인거의 난’ 그 서막이었다. 이 반란의 진압 과정과 그에 따른 포상 기록은 훗날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라는 국가 공식 기록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의궤의 내용 중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이인거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소무녹훈’이고  ‘영사녹훈’은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이공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유효립·정심 모반 사건을 진압한 공을 정리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의궤 가운데 모반 또는 반란을 평정한 공이 있는 사람의 공적을 남긴 녹훈도감의궤는 3종이 불과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인거는 본래 명종 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추의 손자로,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 그러나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 북관 일대를 떠돌며 부모를 잃는 비극을 겪게된다. 그는 부모의 묘소를 고향에 모시지 못한 채 스스로를 죄인이라 자책하며 횡성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 그는 횡성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철저히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 조정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잘 알지 못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그를 칭송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새롭게 들어선 정권은 민심 수습과 인재 등용을 위해 1624년 그에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조선시대에 왕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 위해 설치된 관서)에 두었던 익찬이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 하지만 이인거는 이를 거절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겉모습은 초야에 묻힌 선비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인조반정 주도 세력에 대한 깊은 불만과 자신만의 비뚤어진 정치적 야심이 싹트고 있었다 .

이인거의 불만은 1627년 1월 발발한 정묘호란을 거치며 임계점에 다달았다. 후금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인조 정권은 결국 강화도에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 굴욕적인 화친을 선택했다 . 오랑캐라 멸시하던 후금과의 화친은 당시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성리학자들에게는 충격이자 치욕이었다. 횡성 산골에 머물던 이인거 역시 이 굴욕적 화친에 격분했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 유배돼 있던 대북 세력의 잔당 유효립 등과 남몰래 내통하며, 폐위된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위험한 모의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

1627년 9월 28일, 이인거는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그는 강원감사 최현(崔晛)에게 한 통의 도발적인 상소를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 이 상소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라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강원감사 최현은 이 상소의 내용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조정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합법적인 통로가 막혔다고 판단한 이인거는 곧바로 실력 행사에 돌입했다. 이튿날 이인거는 자신을 따르는 1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횡성현 관아로 들이닥쳤다 .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한 그는 스스로 ‘창의중흥대장’이라는 직함을 내걸었다 . 후금과 타협한 부패한 조정을 뒤엎고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명분으로는 그럴싸한 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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