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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창경바리]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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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봄비가 내린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봄비는 단비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파종하는 시기인 봄날에 가뭄이 들면 그해 농사는 망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땅이 바싹 말라 있으면 씨앗이 발아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말라버린다. 모종도 마찬가지다. 논농사 역시 다르지 않다. 모내기하기 전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꼭두새벽부터 삽과 괭이를 들고 논두렁으로 나가야 한다. 다행히 요즘은 농업기술이 좋아져 옛날만큼 애를 태우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봄비는 그 무엇보다 반갑고 고마운 봄날의 손님이다.  

  봄날은 바쁘다. 일손은 당연히 부족하다. 어린 시절 농번기 때가 되면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아버지들도 있었다. 초등학생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겁니까. 농사일을 잘 모르는 선생님이 찾아가 하소연해도 아버지들은 듣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농번기 방학이 생겼을 것이다. 하여튼 어린 손까지 빌려 농작물을 심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부의 속은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물뿌리개로는 텃밭 정도밖에 감당하지 못했다. 밭에다 물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달려갔다. 감자, 콩, 옥수수, 배추, 무, 당근이 자라는 비탈밭으로. 돌돌 말려 있던 농작물의 잎들이 기지개를 켜는 밭으로. 

  어린 우리에겐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봄비가 오는 게 좋았다. 마을운동장에 나가 비를 맞으며 공을 차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고 또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턱에 베개를 받친 채 빌려온 만화책을 봐도 마음이 편했다. 부엌에선 모처럼 고소한 기름 냄새가 피어났다. 엄마가 산나물로 밀가루부침개를 부치고 있다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밭에서 아버지가 돌아오면 부엌에 깔아놓은 멍석에 둥근 상을 놓고 둘러앉아 가위로 잘라놓은 부침개를 우적우적 먹었다. 쌉싸름한 산나물 향이 미각을 자극하는 부침개였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비가 빨리 그칠까 걱정하고 있었다. 한 이틀은 내려야 해갈이 된다고 말하곤 지게를 지고 꼴을 베러 갔다. 누나와 나도 방으로 들어와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만화책을 넘겼다. 봄비 오는 주말은 농사일을 거들지 않고 실컷 놀 수 있기 때문에 좋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농부들은 제때 봄비가 내리지 않으면 마을의 개울에서 양수기로 물을 끌어와 스프링클러를 돌리느라 바쁘다. 대파밭, 당근밭, 배추밭에서 하루 종일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리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마을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은 찾을 수 없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농용트럭을 몰고 다닌다. 버스를 타고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대파를 심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늘에 둘러앉아 낯선 말을 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돌배꽃 잎들이 눈송이처럼 분분히 날리던 봄날 고향 집 텃밭에 대파 심으러 갔다가 쉬고 있는 그녀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녀들은 나를 보고 미소 지었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문득 그녀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봄비가 내려 일이 없는 날이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느냐고.  

  봄비가 꽤 내리고 있다. 지난번에 심은 대파가 단비를 맞고 좋아서 미소를 짓고 있을 게다. 아니 우리 집 대파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농작물들이 모두 다 노래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어느 집에선 메밀전을 부쳐놓고 낮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들도 숙소에서 고소한 부침개를 부쳐 먹으며 모국의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는 아스팔트 위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저 옛날 생각이나 하면서 봄날을 건너가고 있다. 이번 봄비가 대파밭을 한 뼘 깊이 정도는 적셔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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