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처음 타본 건 초등학교 시절 강릉역에서 북평역을 거쳐 삼척역으로 가는 열차였다. 영동선과 삼척선은 북평역(동해역)에서 갈라졌다. 바다와 터널, 해수욕장,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의 연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열차 안에서 사 먹었던 삶은 달걀과 사이다였다. 그리고 통로를 가득 채운 고무 구박들, 거기에 담겨 있는 생선들에서 풍기는 비린내와 허리에 전대를 찬 아주머니들…… 당시 기차는 대관령 촌놈이 보기에도 신세계였고 삶의 최전선이었다.
다시 기차를 만난 건 춘천의 경춘선이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축구 응원을 위해 단체로 기차를 탔다. 서울 근교에서 내려 전철을 처음 타보는 호사까지 누렸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턴 남춘천역을 이용해 강촌, 대성리, 청량리를 들락거렸다. 한 번은 대성리에 야유회를 갔다가 싸구려 양주에 취해 돌아오는 기차에선 통로에 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한동안 여학생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달랜 건 다음 해 늦가을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서 주최한 문학상 공모에 소설이 당선되었을 때였다. 시상식 뒤 술을 걸친 나는 상금과 신문을 들고 경춘선 열차를 탔다. 어두운 차창에 비친 내 표정은 기쁜 듯도 했는데 어이없게도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듬해 학사경고 누적으로 학교에서 제적이 되었다.
청춘의 경춘선과 이별한 뒤 다시 기차에 올라탄 건 강릉역에서 청량리역으로 가는 막차였다. 군대에 가기 전 동서를 가로지르는 밤 열차를 타고 싶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옆자리 내 또래의 사내는 열차가 출발하면서부터 맥주를 너무 맛있게 마시기 시작했다. 바깥 풍경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열차가 도계의 스위치백 구간을 지그재그로 운치 있게 올라가는데도 사내는 내게 술 한 잔 권하지 않았다. 심포리역과 통리역 사이의 길고 깊은 똬리굴을 한 바퀴 돌아나갈 때도 술을 권하지 않았다. 태백, 고한, 사북, 영월, 제천…… (뭐, 이런 예의 없는 인간이 다 있지!) 주머니에는 돌아올 차비밖에 없었다. 결국 새벽의 원주역에서 내렸다. 매운 겨울밤이었다. 원주역 휴게실 나무 의자에 누워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쪽잠을 청하는데 노숙자분께서 깨웠다. 거긴 자기 자리라고. 할 수 없이 바람이 잉잉 우는 허름한 출입문 쪽으로 옮겨야 했다.
그럼에도 나의 가난한 기차 여행은 멈추지 않았다. IMF 시절 역시 가난한 애인과 정선선 구절리역까지 도착해 대판 싸운 뒤 이튿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청량리역으로 돌아왔다. 선배 시인과는 원주역에서 만나 눈 덮인 태백준령을 지나 도계역까지 가는 동안 식당칸에서 맥주를 기울이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디 그것뿐이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내 고향 대관령에도 KTX 열차가 달리고 있으니 가히 기차의 전성시대인 듯하다.
강삭철도(綱索鐵道)란 게 있었다. 인클라인(Incline) 철도라고도 불렀다. 심포리역과 통리역 사이의 통리재를 연결하는 철로였는데 1963년 똬리굴이 생기면서 운행을 멈췄다.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는 한 량씩 케이블로 끌어올렸다. 승객들은 기차에서 내려 가파른 고개를 걸어 올라가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 대열에 함께 했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내게 술 한잔 권하지 않았던 그 사내도 예외 없이 헉헉거리며 고갯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기차 여행이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