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그런 거 괜찮습니다. 일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혹시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라고 묻자, 김기성(72·사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부끄럽지 않다는 듯, 그렇다고 자랑할 거리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1953년생이다. 중국 단둥시 콴뎬현에서 태어나 록강천 조선족 소학교를 나왔다. “모두 못살았죠.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고생하고 잘 못 먹고 그랬어요.” 구호품으로 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들어 먹거나 소나무 속살을 벗겨 먹으며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런 그는 어린 나이에도 공장과 농사일을 오가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이러한 현실이 그를 무역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 지금은 중국 단둥시에서 퇴직 후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1980년대 말부터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보따리 장사’를 했야 했다.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살기 위해 했던 일”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보따리 장사의 세계는 “한 발 잘못 디디면 끝”이었다. “말조심이 반”이었다고 그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나도 모르게) 나쁜 말 한마디만 해도 그 말이 (어느새) 퍼져나가서 나중에 되돌아오면, 바로 조사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요.” 당시 김씨는 북측과 거래하면서도, 늘 감시를 의식해야 했다. “그 ‘대방’이라는 것이 있어요. 북쪽에서 우리를 거래상으로 맞아주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감시를 받아요. 무슨 말만 해도 뒤에 보위부원이 있고, 건물 주변에도 늘 안개처럼 사람들 감시가 있었어요.” 그는 당시 하루하루가 모험이라고 했다. “달러를 어떻게 들고 들어가고, 어떻게 (들고) 나올지가 항상 고민이었어요. 한번은 진짜 다 들켰나 싶어서, “이제 총살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했죠.” 그의 말에서 당시의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일을 끝낸 후에도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모두 중요했다고 한다. “조선족 친구들한테도, (북과의 무역과 관련된) 그런 얘기를 못 했어요. 괜히 말이 돌아서 북에 들어가면, 활동을 못하게 되니까요. 말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라서…”

김기성씨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여러 차례 넘었다. “해상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육로로도 가고. 그때는 정말 걸었어요. 뭐 하나 팔기 위해서, 진짜 국경 넘고 산 넘고 물도 건넜죠.” 주로 중국에서 양말, 일제 텔레비전 등 북한에서 귀한 생필품을 북한 신의주로 가져가 팔았다. 당시 그는 일본 텔레비전 한 대를 팔면 1,000원 가량의 순이익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북한 집단 농장 노동자들이 한 달에 40~60원을 받던 것을 고려 하면 거의 2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보따리 장사를 통해 자본을 모은 그는 점차 무역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거래 품목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북한으로 오가는 횟수에 제한이 생기면서, 이제는 북한과의 무역에서는 손을 뗐다고 한다. 잠시 말을 고르던 김기성 씨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지요. 모든 걸 내려놓고 조용히 살아가는 지금이 되어서야, 그저 ‘지나간 일’로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된 겁니다.(웃음)” 그가 처음에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일 없습니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던진 한마디에는 셀 수 없는 위험과 고생, 숨죽인 나날들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북중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생존 무역의 역사와, 그 안에서 고난과 번영을 동시에 경험했던 한 개인의 굴곡진 삶을 보여주는 역사책 같은 것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말을 아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지닌 무게는 어떤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중국 단둥시=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