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AI 저널리즘 리빙랩]돌아오지 못하는 탑들 ③유랑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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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물산공진회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정원까지
- 원주탑 100년의 유랑은 왜 아직도 끝나지 않나

◇1932년께 경복궁에서 촬영된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탑 뒤편으로 길을 따라 다른 탑들이 서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1912년 원주지역의 문화재 조사에 나선 세키노 타다시 일행은 원주 읍내는 물론 법천사지, 흥법사지, 거돈사지 등 폐사지 등에 산재한 36개 유물기록을 47장의 필드카드에 남겼다. 필드카드는 각 유물의 명칭과 특징, 조성 시기 등을 연필 스케치, 사진 등과 함께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등급과 가치에 따라 갑(甲), 을(乙), 병(丙), 정(丁)으로 분류까지 해 놓았다. 이는 조사단의 원주 방문이 ‘학술’적인 것이 아닌, ‘약탈’을 위한 사전작업에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의 원주 방문은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됐다.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원주읍지’에 기록된 사실들을 그대로 필드카드에 수록할 정도로 연구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작된 ‘원주 지역 조사 결과표’ 속, 원주탑 상당수는 조선총독부의 지시 하에 고스란히 서울로 옮겨지게 된다. 주로 갑, 을 등급을 받은 석탑들이 대상이었다.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 매일신보 1915년 9월3일자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정원배치석탑불상조건부호략도. 자료=국가기록원

서울로 이사가게 된 원주탑의 흔적은 일제가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이하 공진회)를 준비하면서 제작한 석탑 배치도나 호략도(虎略圖), 조선물산공진회 보고서 등 각종 문서에서 확인된다. 공진회가 종료된 후에도 원주탑의 유랑은 끝나지 않는다. 공진회 당시 미술관 앞을 장식하고 있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을 비롯한 원주탑 등 석조문화재들은 대부분 경복궁 경회루 동편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공진회가 끝나고 20여년이 흐른 1936년에 작성된 ‘총독부박물관 관람안내도’에도 광화문과 경회루에 이르는 길 양 옆에 원주탑들이 한가득 도열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도 정원 조경석과 같은 쓰임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90년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고궁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진 원주탑들은 다시,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으로 또다른 정원(석조물 정원)에 자리를 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역 역사학계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우리 문화재들의 기구한 유랑의 역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제 끊어내야 할 때다”며 “정부의 전향적인 조치로 원주가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석기기자

한림대 미디어스쿨=박근영·강세진·임미영·홍지윤

※ ‘AI 저널리즘 리빙랩’ 프로젝트의 온라인 컨텐츠는 QR코드 또는 강원일보 홈페이지(www.kwnews.co.kr)로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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