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새 혓바닥만큼 돋아나던 나뭇잎들이 봄비를 머금고 싱그럽게 교정을 덮는다. 올해 입학한 1학년 아이들은 유치원 티를 벗고 학교 곳곳을 누비고, 한 학년씩 올라간 아이들도 새로 만난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즐겁게 지내는 모습들이 정겹다.
작은 교실에서 서로 다른 아이들이 어울리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이들이고,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가 마주한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면서 커가는 중이다. 또 그런 걸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학교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기준으로 유리한 것을 이야기한다. “내가 가만히 있는데 쟤가 먼저 날 놀렸어요!” “아니에요. 쟤가 날 먼저 때렸어요.” 틀림없이 누군가로부터 비롯됐을텐데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애매할 때가 많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학교에선 전담 기구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다. 살펴보면 별것 아닌 오해에서 비롯된 일도 있고 때론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있다.
학교는 어른들이 잘못했을 때처럼 법이라는 메마른 잣대를 들이대어 처벌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를 신중하게 고민한다. 그런 고민들을 학교 자체 심의위원회에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문제는 그런 갈등이 아니라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가끔 아이들 간에 일어난 문제를 어른들의 잣대로 재단해 달라는 부모들이 있다. 그게 공정한 것이고 그렇게 해야 우리 아이가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일부 대도시 지역에서는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이런 지역까지 확산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게 잘잘못을 금을 긋듯이 따져서 누가 좀 더 잘못했는가를 정해 처벌한다고 하자. 피해를 당한 아이 마음이 다 풀릴까? 처벌을 받은 아이는 충분히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들의 바람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상처받은 아이 가슴 속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상처를 준 아이는 처벌받은 것으로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위안을 삼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문제 해결은 당사자 모두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길 뿐이다. 상대를 처벌한다고 해서 상처받은 아이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독여주는 것이 먼저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대개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 속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통해 그 문제가 드러났을 뿐이다. 아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을 먼저 볼 것이 아니라 부모인 내가 먼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볼 일이다. 어쩌면 그 안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 맺힌 곳이 보일 것이다. 그걸 서두르지 말고 조심스레 한올 한올 풀어내자. 그곳에서 모든 문제 해결의 종착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른이다. 이 비 그치면 봄비 담뿍 머금은 풀싹들이 한 뼘씩 자랄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봄을 건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