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스타 검사에서 파면까지…尹 영욕의 ‘1,061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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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4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인용
2022년 5월 취임 이후 1,061일만에 파면

◇왼쪽부터 만 2세 시절 강릉 해수욕장을 찾은 윤석열 전 대통령. 1991년 사법연수원 입학 전. 검찰총장 임명장을 받는 윤 전 대통령, 검찰총장 사의를 밝히는 모습. 대선 선거운동기간 강릉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윤 전 대통령. 강원일보DB, 연합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간이 4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종료됐다. 윤 전 대통령은 정치권에 발을 들인지 불과 9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0선 대통령’이라는 전례 없는 타이틀과 함께 보수 진영의 재건을 이끌었지만, 끝은 파면이었다. 검찰에서 시작된 그의 행보는 정치와 권력, 그리고 국민의 심판을 거치며 극적인 곡선을 그렸다.

■8전9기 늦깎이 검사…‘강릉의 외손’ 도민 공감대=검찰총장에서 대통령, 그리고 탄핵과 구속까지 윤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격동의 궤적을 그렸다. 윤 전 대통령은 1960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대학교수 부부의 1남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헌정 사상 첫 서울 출생 대통령이었다.

어린 시절 방학이면 외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 금학동을 찾아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그는 훗날 대선 유세에선 “강릉 외손자”를 자처하며 강원도민들의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내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모의재판을 진행한 뒤 강릉으로 피신했던 일화는 그의 젊은 시절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윤 전 대통령은 9수 끝에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23기 수료 후 대구지검을 시작으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윤 전 대통령은 합격만큼이나 개인사도 늦어 52세이던 2012년 3월 김건희 여사와 결혼했다.

검사 시절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2002년 한때 사직 후 법무법인 태평양의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1년 만에 친정 복귀를 택했고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2003년 SK 분식회계 사건과 불법 대선자금 사건을 시작으로 현대차 비리, 외환은행 매각, 삼성 비자금, BBK 특검, 국정원 댓글 사건 등 정재계 대형 사건의 중심에 섰으며, 강한 수사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선배 검사들의 신임 속에 중수부와 특수부 요직을 차례로 맡으며 승진 코스를 밟았다.

■정권 눈 밖에 나 좌천…박근혜 탄핵정국 속 급부상=윤 전 대통령이 대중의 전면에 선 건 박근혜 정부 집권기인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이었다. 수사팀장으로서 같은해 10월 서울 고검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그는 상부의 외압을 폭로하며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발언해 화제를 모았다. 그 대가는 좌천이었고, 지방 고검을 전전하며 4년여간 조직의 외곽에 머물렀다.

한직을 도는 동안 윤 전 대통령은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는 ‘강골 검사’ 이미지를 굳혔다. 그러던 중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을 맡으며 부활에 성공했다. 국정농단 수사는 결국 박 전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지며 2017년 5월 조기대선의 문을 연 장본인이 됐다.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그는 “살아 있는 권력에도 엄정하라”는 문 대통령의 당부를 소신대로 행동에 옮기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수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조 전 장관의 아내 정경심 씨는 구속기소 됐고, 조 전 장관도 지난해 12월 딸의 입시 비리로 수감돼 의원직까지 잃었다. 윤 전 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까지 파고들었다. 이를 계기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이 전국적 논란으로 비화됐다.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찰을 통해 정직까지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그럴수록 윤 전 대통령의 인기는 올랐고, 문재인 정부는 예상보다 강한 역풍을 맞아야 했다.

■정계입문 9개월 만에 대통령 신화…김여사 의혹 악재=윤 전 대통령은 결국 검찰을 떠났다.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은 2021년 3월, 그는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두 달 뒤 강릉에서 외가 인연이 있는 권성동 의원과 만난 장면이 언론에 포착되며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처럼 비춰졌고, 같은 해 6월 출마를 선언했다. 정권교체를 앞세워 국민의힘에 입당했고, 11월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후보를 제치면서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찼다. 선거 막판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도 성사시켰다. 2022년 3월9일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0.73%포인트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 초기엔 청와대를 떠나 용산 국방부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파격적 행보로 주목 받았지만, 이후 국정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정치 경험 부족으로 인한 불안정한 당정 관계, 무속 논란 등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은 하락 곡선을 그렸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는 여당 참패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과의 대립은 격화됐고, 그는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해 무려 25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45건 이후 최다 수치다. 협치는 실종됐고, 국민 피로감은 점점 누적됐다.

여기에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각종 의혹까지 끊이지 않았다. 여권에서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이나 사과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제기됐지만 윤 전 대통령은 완고했다. 결국 지난해 11월 질문에 제한을 두지 않는 ‘끝장 회견’을 열어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비상계엄으로 추락…두번째 현직 대통령 파면=권력 기반이 약해진 가운데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라는 강수를 던진다. 지난해 12월3일. 감사원장, 서울중앙지검장 등에 대한 야당의 탄핵소추안 발의로 당정 갈등이 정점을 향한 날이었다. 정치적 고립 속에서 무리한 선택이란 평가가 나왔고, 국회는 11일 만에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후 검찰과 공수처의 소환 요구에 불응한 채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지난 1월15일 체포영장이 집행됐다. 국가 원수의 고유 통치 권한으로 사법 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방어벽을 쳤으나 계엄의 후폭풍은 이를 넘어섰다. 계엄은 야당의 폭거에 따른 정당한 행위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4일 헌재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했다. 헌정사상 처음 구속된 대통령이자 두 번째 현직 대통령 파면이라는 기록을 남긴채 그의 극적인 정치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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