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의 점선면]현세의 번뇌를 떨치고 해탈로 향하는 무지개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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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금강산 건봉사 '능파교'

◇보물 고성 금강산 건봉사 ‘능파교''.사진 출처=국가유산청·강원일보 DB
◇고성 금강산 건봉사.사진 출처=국가유산청·강원일보 DB

◇보물 고성 건봉사 능파교 보수공사 동측면도 도면.사진 출처=국가유산청·강원일보 DB

고성의 깊은 산중에 자리한 고성 1경, 금강산 건봉사는 현실과 환상이 맞닿는 문턱, 그 언저리에 존재하는 사찰이다.

그 경계 위에 놓인 하나의 무지개. 건봉사 불이문(不二門·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을 지나면 만나는 아치교(Arch bridge)가 바로 ‘능파교(凌波橋·보물)’다. 세상의 파도를 건너는 다리, “속세의 파도를 헤치고 부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거센 역사의 파고를 지나 지금도 고요히 물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위치한 건봉사 능파교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이야기다. 건봉사에서 대웅전과 극락전을 잇는 짧지만 깊은 무지개 돌다리. 1704년(숙종 30년)부터 1707년(숙종 33년) 사이 조선 숙종대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수차례의 재해와 전란, 복원을 거쳐 살아남은 다리는 단단한 돌이 아닌 시간의 층위로 축조됐다.

홍예교. 능파교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무지개처럼 활처럼 휘어진 돌다리 구조를 말하는데, 능파교는 그 구조미와 기술성에서 단연 돋보인다. 능파교의 홍예는 마치 완벽한 반달처럼 물 위로 휘어 있다. 그 아치의 하부 지름은 7.8m, 사람 몇이 나란히 서도 넉넉할 정도다. 물가에서 아치의 꼭대기까지는 5.4m, 바람이 스치고 새가 머무를 만한 높이다. 폭 3m 남짓의 길은 짧지만 그 위를 건너는 발걸음엔 수백 년의 시간이 포개진다.

다리를 이루는 재료조차 남다르다. 아래 받침은 석영섬록암, 홍예부는 흑운모화강암. 용도에 따라 다른 암석을 사용한 이 치밀한 설계는 돌에 영혼을 새긴 조선 장인의 손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다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저 건축적 우수성에 그치지 않는다. 능파교는 물리적 통로이면서도 정신적 여정의 관문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 즉 현실의 부처와 극락의 부처를 잇는 길. 수행자들은 능파교를 건너며 현세의 번뇌를 떨치고 해탈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다리 한편에 세워진 십바라밀 석주는 그러한 정신적 여정을 조용히 증명한다. 6·25전쟁으로 건봉사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을 때조차 능파교는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마치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사명처럼. 그래서 능파교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닌 잔존하는 과거의 자락이자, 건봉사의 상처를 기억하는 유일한 목격자다.

역사의 단층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대홍수로 무너지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남아 다시 복원됐다. 1745년(영조 21년) 큰 홍수로 붕괴된 후 4년 뒤인 1749년(영조 25년)에 중수됐으나 1880년(고종 17년) 또다시 무너졌다. 이때 무너진 석재의 일부가 대웅전 계단과 산영루 보수에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능파교를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디디고 현재를 건너 미래로 가는 행위다. 이 다리를 지나칠 때 마주하게 되는 고요한 계곡, 그리고 그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마저 준다.

DMZ와 인접한 고성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이 다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접근이 제한되었던 시간은 역설적으로 자연과 다리, 사찰을 온전히 지켜주었다. 능파교가 품은 고요는 그런 시간들의 결실이다. 금강산맥의 남단에 안긴 이 성소는 사라진 것이 많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됐다.

능파교라는 이름은 이미 다리 자체를 넘어선 하나의 이야기다. 만일염불회, 만일(一萬日)의 염송. 아미타불의 이름을 만일 동안 외는 수행이 이뤄졌던 곳. 그 염송의 물결이 다리 위를 지나며 극락으로 향했을 것이다. 신앙의 실천이 삶이 되고, 그 삶이 다리가 되는 순간. 능파교는 그 삶의 형상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이러한 능파교의 위상은 다른 석조 다리들과 비교할 때도 더욱 또렷해진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창덕궁의 금천교, 선암사의 승선교 등 수많은 홍예교가 있지만, 능파교는 그 가운데서도 기록과 보존, 상징성에서 독보적이다.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는 다리의 정확한 연대를 증명하고, 그 존재 이유를 후대에 전한다. 구조만 남은 유산이 아닌, 이야기를 간직한 유산. 그래서 능파교는 지금도 ‘살아 있는 다리’다. 사진을 보면 다리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위를 걷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강풍에 휘어지지 않는 아치처럼, 수많은 세월을 무사히 견뎌온 그 다리는 오늘도 누군가의 ‘해탈’을 위한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능파교(凌波橋) 신창기(新創記)를 허곡의 상족(上足) 운파청안(雲坡淸眼)이 찬하고 아울러 전서를 쓰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31년 갑신(甲申) 이 절의 승(僧) 신계(信戒)가 스스로 강을 건너는 공으로 중록(衆綠)을 얻어 비로소 영여(令如)의 달에 시작하여 경상(景相)의 가을에 일을 마쳐 홍교(虹橋)가 이에 이루어졌으니 어찌 진수(溱水) 건너는 사사로운 은혜라고 하더라고 왕정(王政)에 만에 하나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리를 건설하는 공덕의 성씨(姓氏)를 아래에 열거한다. 숭정(崇禎) 후(後) 81년 무자(戊子) 3월 세우다

능파교신창기비 원문 해설

금강산 건봉사에 있는 능파교(凌波橋)를 새로 지은 사실을 기록한 글을 허곡(虛谷)의 제자인 운파 청안 스님이 지었고, 전서체 글씨도 함께 썼다.

성상(聖上·숙종)께서 즉위하신 지 31년(30년의 오기) 되는 해인 갑신년(1704년)에 절의 승려인 신계(信戒)가 스스로 강을 건너는 공(功)으로 여러 사람의 인정을 받아 비로소 좋은 시기에 공사를 시작하여 경사롭고 무르익은 가을에 일을 마무리하니, 무지개 같은 다리가 이로써 완성됐다.

어찌 이것이 강을 건넌 개인의 사사로운 은혜이기만 하겠는가? 임금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는 매우 뜻깊은 일일 것이다. 이 다리를 건설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성씨(姓氏)는 아래에 열거해 두었다. 숭정(崇禎) 후 81년 되는 해인 무자년(戊子·즉 조선 숙종 34년·1708년) 3월에 이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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