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산보국과 연계되는 산업전사라는 호칭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국민징용령 발동을 준비하던 1939년부터 산업전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전국의 부랑아동을 강제 수용하던 경기도의 선감학원에서는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아동 61명을 도계광업소와 장성광업소에 취업시키면서 국가에 힘을 보태면서 ‘어린 산업전사’라고 추켜세울 정도였다. 강제 수용된 아동들은 소년부대라는 별도의 소집단으로 구분되어 탄광노동과 사생활을 통제받았다.
제국주의가 만든 산업전사라는 용어를, 해방 후의 한국 정부가 그대로 계승하였다. 일반산업체에 붙이던 구호와 구분하기 위해 1949년에는 ‘탄광산업전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국영기업이던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에서 1949년에 진행한 ‘3·1절 기념 채탄 증산 주간’은 탄광노동과 애국을 엮은 정부의 전략에서 나왔다. 탄광산업전사는 채탄주간에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생산 실적을 요구받았다.
1955년부터 상공부가 해마다 주관한 탄광모범산업전사 표창식은 기념식과 대통령 집무실 방문 외에도 서울 시가행진을 하는 등 3일간에 걸쳐 대대적 환영 행사를 이어갔다. 첫해 모범산업전사 19명이 선발된 것은 19공탄으로 불리는 연탄의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탄광모범산업전사가 지역에 돌아오면, 지역 행정기관 주관으로 큰 운동장에서 별도의 환영행사를 열었다. 정부가 광부들을 위해 '모범산업전사의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고, 모범전사의 활동을 대한뉴스로 제작해 홍보하면서 광부에게 산업전사를 내면화했다. 돌로 건축한 모범산업전사 사택을 제공하면서 탄광촌에 산업전사의 의미를 강화했다.
1960~1970년대 겨울마다 이어지던 연탄 파동, 1970년대 두 차례나 찾아온 세계적인 석유파동은 석탄 증산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했다. 산업전사로 내면화된 광부는 석탄증산이 애국의 길이라고 여겼다.

석탄이라는 단일산업으로 도시를 이룬 태백시는 시정목표로 “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라는 구호를 사용하였으며, 시민헌장에다 “우리 시민은 천혜의 보고인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는 산업역군으로서 성실히 노력하고 보람에 사는 시민이다”라고 명시했다. 삼척시의 도계광업소는 월급봉투 뒷면 '가정통신문'(1982년 7월)을 통해 “어린이는 소중한 석탄을 캐기 위해 검은 작업복을 입고 계신 산업전사의 자식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시다”라는 가족용 계몽 문구까지 넣었다.
1983년 태백시에 건립된 대한석탄공사 직업훈련원은 ‘산업전사로서의 긍지와 사명감 고취’가 목표라고 밝혔다. 석탄합리화 시행 2년 전인 1987년에만 해도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노태우가 사북읍 동원탄좌 광장에서 “나는 산업전사 여러분들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지하의 막장에서 수고하는 산업전사들을 껴안고 격려한 뒤 이곳에 왔다”면서 ‘산업전사’를 반복하여 강조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산업화가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다른 산업체에서는 산업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광부들은 변함없이 사용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산업전사라고 내세우는 직종은 광부가 유일하다.
산업전사라는 명칭은 국가산업에 중요한 에너지원인 석탄을 생산한다는 자부심 외에도 잦은 탄광 사고를 반영한다. 1969년부터 석탄합리화 직전인 1988년까지 연평균 182.8명의 광부가 사망했다. 광부들이 출근하면서 ‘저승밥을 싸서 다닌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탄광재해율이 일반노동자에 비해 10배 가까이 높았으므로, 광부가 산업전사의 표상으로서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갱내에는 낙반이나 붕락사고 외에도 출수·가스폭발·운반사고 등 대형사고들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선 생산, 후 안전’이라는 압박 속에서 일해야 했다. 탄광노동자 수가 가장 많던 1986년에는 68,861명의 광부가 탄광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무사히 퇴직한 광부라고 하더라도 매년 300명 이상의 퇴직 광부가 진폐증으로 순직하고 있다.

태백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다 순직 광부를 위로하는 ‘산업전사위령탑’을 세우고,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써서 탑신에 새긴 것은 이들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전사위령탑 옆에다 2003년 진폐재해순직자 위령각도 세워 놓았는데, 탄광 대부분이 문을 닫은 지금도 진폐증으로 인한 순직자 수는 줄지 않고 있다. 광부들의 헌신과 희생은 위령탑과 위령각을 통해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셈이다.
삼척시 도계읍에는 광부들이 죽지 말라고, ‘석탄산업전사 안녕 기원비’까지 시내 중심부에다 세워 놓았다. 그것도 부족하여 ‘석탄공사 본사의 안전기원제-도계광업소의 안전기원제-갱 단위의 안전기원제’ 등 3단계의 안전기원제를 각각 지내왔다. 도계에서 현재도 운영되고 있는 ‘도계광업소의원’이나 이전에 존재하던 도계의 경동탄광병원, 태백의 장성광업소 부속병원·강원탄광부속병원·함태탄광의원, 정선의 함백광업소 부속병원처럼 광업소가 직영으로 운영하던 병원은 탄광의 빈번한 재해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징용 광부가 그러하듯, 해방 후의 광부 역시 국가의 산업정책에 동원되고 희생된 측면이 있다. 이제, 우리는 광부들의 이러한 기여와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노고를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석탄산업전사 추모 및 성역화 추진위원회(회장:황상덕)는 2020년부터 ‘광부의 날’ 제정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 러시아, 폴란드 등 여러 나라가 광부의 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북한은 광부절 외에 탄부절까지 별도로 두고 있다. 미국 탄광보다 재해 비율이 40배 높은 한국은 산업전사와 증산보국 같은 요구만 있었을 뿐, ‘광부의 날’ 같은 예우가 없었다. 올 초에 국회에서 광업법 개정을 통한 ‘광업인의 날’ 지정이 발의되기도 했다. 광업인의 날은 탄광기업인을 위한 날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므로, ‘광부의 날’로 수정하여 제정해야 한다. 광부의 날 제정은 산업전사로 살아온 광부들의 헌신과 희생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기리며, 그들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