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시 강동면의 시골마을. 은퇴 광부 박창희(75)씨의 집에는 본채보다 더 커 보이는 40여평 크기의 창고가 있다. 박씨는 창고에 자신의 평생을 저장해뒀다. 문을 열자 박씨와 동료들이 실제 사용했던 탄광의 물품 수십여점이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바위를 뚫고 발파용 화약을 주입하는 오거드릴과 착암기, 탄광 관리자급 광부들의 권위를 상징하던 따꼬망치, 갱도의 한줄기 빛인 캡프(안전등), 캡프 이전에 쓰던 카바이트등, 공기 주입 기능이 있는 방진마스크, 베테랑 광부인 선산부의 개인장비로 알려진 톱도끼 등 진귀한 장비들이 가득하다. 막장, 경석장 등에서 작업 중 발견한 삼엽충, 고사리, 대나무, 국화 화석을 소개할 즈음 박씨는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박씨는 강릉시 강동면 임곡리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박씨의 아버지는 모전리 산두골에서 광부로 일했다. 8살때부터 아버지를 돕겠다며 석탄과 잡석을 골라내는 선탄장에서 일했다. 20세에 강릉의 한 광업소에 정식으로 취직한 그는 경력을 쌓고 능력을 인정 받으면서 여러번 큰 광업소로 옮겼고 마침내 직원이 1,300여명에 달하는 태백 한보광업소에서 선산부(베테랑 광부를 의미, 경력이 짧은 광부는 후산부)의 위치까지 올랐다.

평생을 광부의 자긍심으로 살아왔지만 마치 역설처럼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막장사고의 두려움과 동료를 잃은 슬픔이다. 탄광에서 동료가 사고로 숨질 때마다 기억에 새겨졌고 그 기억은 무려 70명이다.
1996년 박씨가 일하는 탄광에서 지하수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00여명의 구조대가 편성돼 149시간 동안 필사의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막장에 갇힌 15명은 끝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박씨 역시 당시 구조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사망자 중에는 강릉의 작은 광산에서 함께 일을 시작해 태백의 대형광산까지 같이 올라온 평생 동료가 있었다. 태백의 큰 광산으로 가자고 먼저 제안했던 동료였다.

박씨는 “당시 16명이 매몰돼 필사적으로 구조하려 했지만 결국 1명만 구조하고 다른 동료들은 모두 숨졌다. 당시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며 울먹였다.
그의 남은 꿈은 자신의 평생이 담겨있는 석탄산업의 유산들이 빛을 보는 것이다. 박씨는 “젊을 적에는 주변 탄광들이 하나둘 폐광하는 것을 보면서 박물관이나 해볼까 하는 기대를 갖고 광업소의 장비와 유산 등을 모았다”면서 “이제는 나이가 너무 들어 어려울 것 같다. 석탄박물관 등에 기증하고 전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이 탄광을 기억하길 바란다. 아이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