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그냥 걷고 싶을 때.... 그럼 나는 길 위에 선다. 오면 감동을 주는 강원도의 길, ‘오감 로드(五感 ROAD)’다.

철원 물윗길. 봄철이면 딱 한달만 허락되는 길이다. 그래서 더 귀한 곳이다.
지난 7일. 태봉대교 주차장, 그 길의 들머리다. 내비게이션에 ‘물윗길 매표소’가 뜨면 거기가 거기다. 입장권을 사면 건네받는 분홍색 종이 팔찌(?)를 손목에 두르고는 트레킹 출발이다. 입구 천막을 통과해 길을 내려가다 오른 쪽으로 가면 직탕폭포, 좌회전하면 물윗길에 바로 오를 수 있다. 일단 좌회전.
간단하게 말하자면 철원 물윗길은 한탄강 물 위를 걷는 코스다. 아니 날아가는 코스다. 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다가 심심치 않게 내 눈높이로, 아주 낮게 날고 있으니 그렇다. 그러고 보니 부교의 “토~옹... 통, 토~옹...통” 거리며 라임을 맞추는 소리도 유쾌하게 다가온다. 지르 밟을 때 출렁, 힘을 뺄 때 출렁이며 반동을 타고 내 몸이 조금씩 날아 오르니, 길이 살아 있는 듯 재미나다.

한탄강, 오래전 그날 거대한 불기둥이 대지를 뒤덮으며 시작된 강. 그 뜨거운 시간은 돌로 굳어 절벽이 되었고, 절벽은 강을 끌어안아 오랜 세월을 흐르며 물길을 내었다. 그 물길 위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길이 놓였다. ‘한탄강 물윗길’은 자연과 인간이 시간의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장소다.
물윗길 트레킹은 온갖 감상이 쏟아지는 태봉대교 아래에서 그렇게 시나브로 시작된다. 넉넉한 품의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양옆으로 늘어선 주상절리가 바람과 햇살을 안은 채 발길을 내딛는다. 발 아래, 투명한 물살 너머 검게 가라앉은 현무암 바닥. 저 바닥이 바로 54만 년 전 용암이 식어 만든 대지의 피부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이는 순간, 물속 바위는 잠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강이 품고 있는 오랜 기억들이 그 물결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듯하다.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송대소(松臺沼). 주상절리를 쌓아 올린 수직절벽이 강 위에 부유하는 곳이다. 명주실 한 타래가 다 풀려 갈 정도로 깊다는 소(沼) 위를 걷는 느낌,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절벽을 어깨 위에 떠받치고 있는 기분이 더해지면서 묘한 전율을 일으킨다.

걷다 보면 시선이 절로 위를 향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횃불전망대가 높은 하늘 위에 우뚝 서 있다.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등대처럼, 한탄강의 유구한 역사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계절이 만들어낸 얼음조각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다. 그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춘다. 이어서 등장하는 마당바위는 쉼표 같은 곳이다. 강물이 깎아 만든 널찍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발밑이 단단한 바윗길로 바뀐다. 한탄강 물윗길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바람이 바뀌고, 내음이 변하고, 길맛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자연은 작은 놀라움을 숨겨 둔다.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길목에서 마주한 봄을 품은 버들가지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곳이야말로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어느덧 승일교 아래에 다다른다. 강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다리는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연결하는 듯하다. 그 아래, 얼음벽이 장관을 이룬다. 승일교를 지나면 물길 위에 놓인 바나나 매트 길이 발을 맞이한다. 말랑한 감촉의 길을 따라 시나브로 걷다 보면, 여기저기 작은 돌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군가가 소망을 빌며 쌓아 올린 돌탑들, 제각각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바람과 햇살을 머금은 모습이 귀엽고 정겹다.

그렇게 걷다 보면 마침내 고석정이 눈앞에 나타난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그 아래로 흐르는 강물. 절경이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한탄강을 오랫동안 품어온 이 바위는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며 그 속에 서린 시간을 헤아려 본다. 물줄기는 힘차게 흘러가고, 바위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그 모습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절경을 두 눈에 담는다.
트레킹의 끝자락, 드디어 날머리 순담계곡 도착이다. 마치 한탄강의 수많은 이야기가 이곳으로 모여드는 듯하다. 이곳은 동시에 잔도(棧道), 주상절리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현무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웅장하다. 또다시 길을 이을 수도, 여기서 매조지할 수도 있다. 아무튼 한탄강은 이러구러 여전히 흐르고 있고, 물 위를 걷고 날아가는 일은 여전히 짜릿함 그 자체다.
강은 흐르고, 길은 이어진다. 한탄강 물윗길을 부유하며 우리는 계절 사이에 서 있었고, 자연을 느꼈으며, 역사의 한 자락을 밟았다. 한탄강 물 길을 걷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여행하는 일임을, 철원의 물윗길은 조용히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